우리 안에 '우리'가 아닌 자들이 있다
우리 안에 '우리'가 아닌 자들이 있다
  • 유대칠
  • 승인 2019.10.02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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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유대칠 칼럼
명동대성당 ⓒ위클리서울/ 김승현 기자
명동대성당 ⓒ위클리서울/ 김승현 기자

[위클리서울=가톨릭일꾼 유대칠]  ‘고난’은 누구의 몫인가? 조선 위정자들의 실패는 이 땅에서 힘겨운 일상을 열심히 산 민중의 몫이었다. 조선 위정자의 실패로 나라를 잃었지만, 그들 위정자는 ‘벌’을 받지 않았다. 이젠 ‘친일파’인지 ‘충일파’인지가 되어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렇게 그들이 잘 사는 동안 민중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자신들의 실패로 나라가 망했지만, 전혀 부끄러움 모르는 위정자들은 이제 친일파가 되어 일본의 손발이 되었다. 민중을 끌어내어 죽음과 같은 고난의 시간을 강제했다. 그렇게 살게 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벌’을 받지 않았다. 이젠 독재자가 되어 민중 위에 군림했다. 조선도 일제강점기도 그리고 반민주 독재 시기에도 민중은 이 땅 역사의 주체가 되기 못했다. 겨우 다스려지는 대상으로 이 땅을 살아갈 뿐이었다. 혹시나 눈 밖에 나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속으로 들리지 않게 울며 분노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임진왜란 때도 6.25때도 그들은 민중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리고 항상 당당했다. 부끄러움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민중은 일본에 끌려가 죽음 같은 고난의 시간을 살았다. 한마디로 죽어 살았다. 하지만 부끄러움 모르는 당당함은 그 고난의 시간을 매춘이라 모욕한다. 역시나 부끄러움은 없다. 무엇이 잘못이냐고 오히려 큰소리 친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무고한 이를 잡아 고문해 간첩으로 만들어 버렸다 해도 무엇이 부끄러움인지 모른다. 민중이란 그들에게 필요하다면 간첩으로 만들어 버려도 그만인 그러한 존재다. 부끄러움 없이 말이다. 이제 조금 알 것이다.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왜 그들은 울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그리고 ‘반민주 독재 시기’에도 민중의 고난으로 인해 운 적이 없다. 부끄러움도 없다.

그들은 그런 존재다. 여전히 “나는 너희 위다! 이 천한 아랫것들아!”라고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자기 욕심을 위해 이용해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다. 그냥 자기만 웃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촛불을 들고 눈물을 보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차디 찬 물 대포에 사람이 죽어도 울지도 않는다. 당연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런 이들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구하는가!

그들은 민중을 ‘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우리’라고 생각한다면, 부당한 사회를 향하여 분노하는 이에게 ‘빨갱이’라며 협박하겠는가! 죽음 같은 시간을 살아온 이에게 ‘매춘’이라며 조롱하겠는가! 차디찬 바다로 가족을 보낸 눈물을 향하여 더 많은 보상금을 챙기려 한다며 모욕을 주겠는가! 겨우, 민중을 노비 정도로 생각하는 이에게! 아직도 우리 노동자를 노비 정도로 생각하는 이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가! 그런 기대는 거두어야 한다. 착한 주인이 찾아와 우리를 구해 주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희망은 착은 주인이 와서 주는 선물이 아니다. 그 착한 주인이 언제 변심이 들어 다시 가져갈지 모르는 그러한 희망은 참된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우리의 밖이 아닌 우리의 안에서 드러나 살아야 한다.

나의 아픔을 조롱하는 이와 나는 우리가 될 수 없다. 한국이란 국가에 같이 살지만, 나는 그와 더불어 우리가 되진 못한다. 그에게 나는 남이고 나에게 그도 남이다. 절대 우리가 아니다. 우리 가운데 나와 너는 남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너의 눈물은 나의 눈물이다. 우리 가운데 나의 눈물도 너의 눈물이다. 그렇게 우리 가운데 나는 너에게서 나의 눈물을 본다. 너 역시 나에게서 너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다. 그리고 이런 서로가 서로에게 더불어 있는 모습이 희망의 첫 걸음이다. 이제 ‘우리’가 되어 역사의 주체가 되겠다는 첫 걸음이다. 홀로 역사의 주체성, 그 무게를 이겨 낼 수 없다. 더불어 우리로 있어야 한다.

‘한국’은 ‘우리’인가? 아직 ‘한국’은 ‘우리’가 아니다. 아직도 누군가의 아픔, 이 시대의 부조리로 아파하는 누군가의 고난을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너네의 아픔이고 너네의 눈물이라며 등 돌려 버린다. 아니, 아예 고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과연 ‘우리’인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인가? 같은 국가 대표팀을 응원한다고 ‘우리’인가? 정말 그들에게서 희망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희망은 우리 가운데 너와 나, 서로가 서로의 아픔과 고난을 남의 것으로 보지 않고, 너의 고난도 나의 고난이며 나의 고난도 너의 고난이란 삶, 그렇게 더불어 울고 웃으며 나와 너가 우리로 더불어 있는 이 땅 민중의 우리 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희망이 자라야 한다. 절대 우리 밖, 우리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이에게서 오지 않는다.

‘고난’은 누구의 몫이었나! 그 수많은 ‘악행의 주체’가 만든 그 ‘고난의 눈물’은 누구의 볼에 흘렀나! 바로 ‘우리’다. 우리 민중이다. 이제 ‘고난의 주체’가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제 자신들의 추악한 민머리를 드러난 이들을 향하여 외쳐야 한다. 여기 ‘우리’가 있다고 말이다. 여기 진짜 우리 ‘역사의 주체’가 있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밖 율사들을 경계하라는 루카복음의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읽어보자. 우리 밖, 우리 위에서 우리를 군림하려는 우리 밖 그들에 다시는 속지 않겠다 다짐하면서 말이다.

“율사들을 경계하시오.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입고 나다니기를 바라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높은 좌석을,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합니다.”(루카 20,46)

 

<유대칠 님은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면서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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