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C.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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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모든 사회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중 국가라는 틀 안에서 정치적 분투의 감정들을 풀어놓는 이 방대한 책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선구자 보마르셰의 연극에 기반을 둔 이 오페라는 정서의 구축에 초점을 맞추며 봉건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그리고 있다. 누스바움은 이 오페라를 공적 문화의 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린 철학 텍스트로 평가한다. 새로운 질서는 마음속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안정성을 획득할 수 없는데, 이 오페라는 남성 중심의 앙시앵레짐이 갖는 규범을 깨부수는 동시에 새로운 시민 개념까지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루소나 헤르더의 저작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텍스트다.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은 백작 부인이다. 앙시앵레짐의 권위적인 목소리를 대변했던 남편과 달리, 동정을 구하는 요청에 부인은 ‘좋아요’라고 답하며 새로운 체제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저는 훨씬 더 다정해요. 그리고 제 대답은 ‘좋아요’예요.” 음악의 각 마디는 마치 무릎 꿇고 있는 남편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음이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진다.

누스바움은 인간 존재의 허약함에 대해 보이는 이런 동정적이고 너그러운 태도가 공적 문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타인에게 너그럽게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엄격한 규범에 앞서 유연함을 보여준다. 이는 불완전한 것들을 증오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포용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를 요구한다. 그녀의 “좋아요”는 바로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논하려는 정치적 사랑의 유형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듀엣곡은 불안하며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자유의 모습 너머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완벽함을 동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과 광란의 사건들 속에서 호혜, 존경, 조율을 구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점증적으로 자유, 박애, 평등을 추구하면서 그 이념들이 요구하는 것에 “네”라고 화답한다. 완전함을 바란다면 이 새로운 체제는 실패할 것이다. 오히려 환상을 갖지 않고 얼마간 냉정한 시선으로 박애라는 희망을 유지하려면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비뚤어진 신뢰감과 같은 것이 조금 필요하다. 이러한 신뢰, 수용, 화해와 같은 개념은 텍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 안에 담겨 있다.

누스바움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자질은 공감력과 동정, 연민이다. 즉, 품위 있고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과제는 나르시시즘과 맞서 싸우면서 이들 감정을 확장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불행에 직면한 옆 사람을 봤을 때 인간은 대개 타인을 자신과 거리가 먼 존재로 여긴다. 그에게 벌어진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거나 타인만큼 나도 취약하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간은 쉽게 자아도취적 기획들에 갇히며, 자신의 협소한 굴레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의 요구는 금세 잊어버리곤 한다. 이로써 생겨나는 거리감은 계급, 인종, 성별을 비롯한 여러 정체성을 구획짓는다.

이것들은 종종 혐오나 낙인을 만들어낸다. 특히 혐오는 타인을 이른바 순수하고 초월적인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미천한 동물로 표상하면서 드러내는 감정이다. 혐오는 신체적 허약함을 종속적인 집단에 투사하면서, 그리고 그런 투사를 더 견고한 종속의 이유로 이용하면서, 지배 집단의 몸의 진실을 부인한다.

물론 우리가 꼭 “비슷한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는 데 실패하면 행복주의적 사고에도 실패하게 된다. ‘나와 같지 않다’거나 미천한 동물성으로 타자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를 내 삶의 테두리 밖으로 추방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라면서 삶의 여러 곤경에 대해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비극적인 관점은 인간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이해하게 하며, 희극적인 관점은 증오보다는 유연함과 자비를 통해 껴안는다. 우리는 타인의 운명 속에서 나 자신의 운명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곧 내 운명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자기 삶의 한계 내에서 감정들을 점진적으로 확장시키기 때문에 아무리 덕성을 함양한다 해도 자기 모순과 타인의 경멸에 직면하게 된다. 쌓아온 교양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걸 가끔 가로막긴 하지만, 그래도 겉과 속이 다르다면 민주 시민은 위선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누스바움은 영국의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을 중요한 사례로 거론한다. 인간 덕성에 관해 머독이 던진 질문은 정치적 삶과 관련해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머독은 며느리에게 화가 난 시어머니를 가정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당돌하고 저속하고 짜증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육을 잘 받은 부류인 시어머니는 이런 느낌을 성공적으로 숨기며, 꼭 며느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실 그녀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렇더라도 며느리에 대한 판단이 자신의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점들, 가령 계급적 편견, 개인적 시기심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을 깨달은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공평한 감정으로 바라보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며, 마침내 성공적으로 이런 태도를 갖게 된다.

머독과 같이 누스바움은 내면의 도덕적 노력이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시어머니는 적극적이었고,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어떤 일을 했다. 누스바움은 정치 문제에서 이런 노력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시민들은 감정이라고는 없이 마치 텅 빈 로봇 같을 테고, 아니면 처음에 시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좋지 못한 감정을 품지만 이내 올바른 행동을 하고 충실하기 처신하며 자제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머독은 상상력과 감정이 개입되는 노력을 통해서 내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시어머니를 설득력 있게 옹호한다. 그녀는 며느리를 편견 없이 보려고 애쓰면서 도덕적으로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사례를 우리는 현실에서 그려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록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을 좀 덜 편향적으로 보려는 내적 노력에 동참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있다. 시민들의 경우도 진정 타인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자가 있는 반면, 그저 법 준수에 충실한 시민이 있다. 하지만 마음으로 완전히 동하지는 않고 그저 법을 준수하기만 하는 시민이라도 우리는 그들을 칭찬하고 보호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민은 그저 무기력한 시민보다 훨씬 더 호소력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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