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구이를 먹었어야 했는데…
장어구이를 먹었어야 했는데…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9.10.28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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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갓나락 베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사 준다는 장어구이를 안 먹기로 최종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제야 비로소 내가 참 바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먹겠다는 결심을 쉽게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장어구이 얘기가 나온 뒤로도 한 시간? 두 시간? 글쎄 정확한 시간까지는 모르겠다. 갓나락을 다 베어낼 때까지였으니, 최소한 두 시간은 넘었으리라. 어쨌든 고민이 깊었다. 땅에 떨어진 누군가의 돈을, 지갑도 없이 그냥 돈만 떨어져 있을 때, 그것을 줍는다는 생각도 없이 후딱 주워들고 난 뒤의 고민도 아마 그만큼은 깊지 못 했을 것이다.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은 첫째, 너무 많이 먹이면 쓰러진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정성 가득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등의 극히 초보적인 일반상식에 속하는 일이므로 굳이 외워둘 필요도 없다.

영화배우 정우성과 똑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정우성이의 논에 벼들이 죄다 쓰러져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 말이 떠올랐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아마 수도 없이 그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농작물에 거름을 너무 많이 주면 작물이 열매를 맺을 생각은 안 하고 계속 키만 키우다가 거센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면 그대로 푹 쓰러지고 만다는 얘기, 어른들 간에 오가는 그런 얘기를 헤아릴 수도 없이 듣다 보니 새겨둔다는 생각도 없이 머릿속에 마치 문신처럼 새겨졌다.

“같이 좀 합시다. 나 혼자서는 정나미가 떨어져서 못 하겠당게라.”

금년에는 태풍이 많았다. 태풍이 한 번 왔을 즈음 벼이삭이 패기 시작했고, 태풍이 두 번 왔을 때 벼이삭에 알이 차기 시작했고 태풍이 세 번째 지나간 뒤에 벼는 쓰러진 채로 익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 정우성이는 나만 보면 보채기 시작했다. 나락이 죄다 쓰러져서 꼴도 보기 싫다고,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 하겠고, 일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생각만으로도 맥이 빠져서 당최 엄두가 안 난다고, 그러니 나더러 옆에서 잔소리도 좀 해주고 하여튼 어떻게든 힘을 좀 보태달라는 얘기였다.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옛날처럼 낫으로 죄다 베기로 한다면야 몇날며칠이 걸리겠지만, 벼농사의 모든 과정을 기계로 처리하는 시절이고 보니 혼자서도 한나절이면 널널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거리였다. 나락을 베어서 탈곡까지 해 치우는 기계 콤바인이 논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고, 커브를 만나면 기계가 후진과 전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것이 이른바 갓나락 베기라는 것이었다.

 

태풍에 쓰러진 나락
태풍에 쓰러진 나락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너무 한심해서 일손이 안 잡혀
너무 한심해서 일손이 안 잡혀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논배미가 사각형으로 정리가 잘 된 것이라면 사방 네 귀퉁이만 베어내면 되지만 정우성이의 논배미는 그런 고급진 논이 아니었다. 정리가 잘 된 논은 통상 한 필지 삼천여 평의 규모를 자랑하지만 정우성이의 논은 마을 바로 옆에 붙어 있고, 애초에 경사가 십오도 가까이나 되었던 까닭에 조각조각 조각나 있었으며, 게다가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식으로 흩어져 있기조차 했다. 그래서 갓나락을 베어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의 노동이 필요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쓰러진 나락을 하나씩 일일이 세워줬었는데 잉?”

쓰러진 나락을 보고 있던 내 입에서 절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정우성이는 학교에서 단체로 나락 세우기 작업 지원을 나갔던 추억을 끄집어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작업은 대단한 장관이었다. 초등학교는 삼 학년 이상 육 학년까지, 중고등학교는 전교생이, 한 반에 육십 명도 넘는 학생들이 들판으로 쏟아져 나왔으니, 재잘대며 웃어대는 소리는 산이라도 옮길 것만 같았고, 호시탐탐 아무 데로나 뛰쳐나가는 아이들을 통제하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선생님들의 호루라기 소리는 짐짓 날카로우면서도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일이 아니었다. 축제였다. 답답한 교실을 벗어났으니 우선 신명이 났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좋다고 깔깔깔 웃어대는 여유도 있었다. 자기 얼굴에는 더 많은 흙이 묻어 있는데도 친구의 콧등에 흙이 묻었다고 놀리며 웃어대는 그런 노동축제의 적나라한 즐거움을 요즘 아이들은 아마 꿈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그런 시절이 되었구나.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로 몸살을 앓아야만 할 정도로 먹을 것이 많아진 지금 시절은 쓰러진 나락 일으켜 세우기 작업 같은 것은 아예 생각조차 안 해버린다. 해마다 문을 닫는 학교가 늘어나는 농촌 상황에서 그런 작업에 나서줄 만한 학생들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설령 학교에 학생들이 많다 해도 과거의 그런 축제 분위기를 연출할 생각 같은 것은 아마 꿈에서도 해보지 못할 것이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사실은 나락 농사를 짓는 사람 자신들이 벌써 그런 쪽으로는 생각머리를 돌리지 않는다. 나락을 일으켜 세우느라 고생하는 시간 동안 다른 데 가서 품을 팔면 최소한 다섯 배는 더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현실론 때문만은 아니다. 그까짓 거 해봐야 몇푼이나 되겠느냐고 하는, 그런 개고생을 할 바에는 그냥 놀아버리는 게 낫다는 일종의 자포자기 같은 것이 농민들의 마음에 똬리를 튼 지도 겁나게 오래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창피해서도 못 한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자신의 가난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되니까. 하고 싶어도 못 한다.

 

누가 볼까 창피해서
누가 볼까 창피해서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우렁이가 돌아왔다.
우렁이가 돌아왔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어디 멀리 가서 찾을 필요도 없이, 정우성이가 그런 사람이다. 작년에는 거름을 너무 안 줘서 수확량이 남 보기 창피할 정도로 적었다고, 그래서 금년에는 거름을 제법 듬뿍 줬더란다. 벼이삭이 팰 무렵에 비바람이 이렇게도 자주 거세게 몰아칠 줄 알았더라면 누가 그런 짓을 했겠느냐고 항변까지 한다. 어쨌든 태풍은 자주 왔고, 벼는 쓰러졌다. 흙을 만나면 싹을 내서 번식을 하고자 하는 식물 씨앗의 특성상 맨 아래쪽에서는 지금쯤 싹이 나서 자라고 있을 것이다.

수확의 계절에는 뽀송뽀송해야 할 논바닥이 아직도 질척거리는 데가 많고, 말라서 갈라진 곳에는 우렁이 새끼들이 나와 있다가 발에 밟힌다. 물이 찰랑거릴 때는 송사리와 미꾸라지도 제법 보였고, 그것을 먹겠다고 날아든 황새와 두루미가 꽤 있었더란다. 과도한 살충제 사용으로 사라졌던 우렁이와 미꾸라지 그리고 송사리가 돌아온 게 언제부터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생명이란 이렇게도 귀신같은 것인가 보다.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든 돌아오는 것. 그래서 우렁이와 송사리는 돌아왔고. 먹을 것이 없어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던 황새와 두루미들도 돌아왔건만, 도시로 떠난 사람들은 돌아올 줄을 모른다. 왜? 사람은 우렁이와 송사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니까.

“밥 때가 되야 가는디, 뭐 먹을라요?”

장화를 신고, 낫을 들고 논바닥으로 들어간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았건만 정우성이는 점심밥 타령부터 한다. 그러면서 전화기를 끄집어낸다. 자기 혼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아마 그런 타령은 안 했을 것이다.

“먹긴 뭘 먹어 이 사람아, 농사도 요따위 엉망으로 지어놓은 주제에.”

“그래도 그것이 아니제.”

하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자기 혼자서 할 때는 대충 그냥 굶어가면서 하다가 다 끝내고 난 뒤에 막걸리나 들이켜고 말겠지만, 단 한 명이라도 누구 다른 사람이 있으면 무엇이든 어떻게든 먹이려고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살가워서 목울대가 간질거린다. 깜빡 눈물이라도 비치면 어쩌나 싶어 하늘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데 불현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큰일을 치르기로 결정하고 날짜가 잡히면 으레 장날을 기다렸다가 장에서 무엇이든 사 들고 오시던 어머니.

모내기든 탈곡이든, 식구가 아닌 한 명 이상 다른 집 사람과 일을 하는 날은 그날이 곧 큰일을 치르는 날이었다. 큰일을 치르는데 식구들끼리 아무렇게나 먹던 것을 내놓고 먹으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일 치르는 날짜가 잡혔다 하면 장날을 기다리고, 장에 가서 무엇이든 이런저런 색다른 요리 거리를 사 들고 오셨다. 그때는 라면이 귀해서 오전 참거리로 라면을 사고, 오후 참에도 라면을 내놓을 수는 없다 해서 무엇이든 다른 것을 산다. 그리고 점심 반찬으로 갈치 토막 몇 개와 자반고등어 혹은 꽁치를 사고, 마음을 크게 먹기로 했을라치면 허연 비갯살이 그렇게도 맛나게 보일 수 없는 돼지고기를 사 들고 오시기도 하는데 아아, 아이들에게는 그날이 진정 잔칫날이 되던 것이었다.

요즘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전화 한 통이면 먹을 것이 달려와 준다. 큰일을 해도 배달이요, 작은 일을 해도 배달인 세상이 되었으니, 배달민족이라는 말이 그렇게도 이상하게 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웃긴다. 그러나 즐겁지는 않다. 배달음식이란 뭐냐. 석유난로에 넣어주는 석유와 같은, 이른바 경제논리라는 것이 철저하게 작동될 뿐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은 녹아들기 어렵다. 사람의 마음만으로도 배가 불러진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촌놈에게 배달음식이란 끔찍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처참한 몰골
처참한 몰골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콤바인 작업
콤바인 작업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래도 먹기는 먹어야 한다. 안 먹으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쓰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짜장면이나 먹을까? 아니면 짬뽕? 둘 중에 하나 아무 것이나 주문을 하라 했더니 정우성이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어대었다. 오늘이 하필 정규휴일이란다. 다시 다른 데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배달거부 통보를 받았다. 식당에 주문량이 너무 많아서 2인분은 배달을 포기하는 정책을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 다 끝내고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자는 게 내 생각이었지만, 정우성이는 포기하지 않고 그 뒤로도 여기저기 아무 데나 몇 번 더 전화를 해 보는가 싶더니 한순간 뜬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장어나 먹으러 갑시다.”

“장어? 뭔 정신 나간 소리여?”

“우리 선민이가 장어 사준다고 안 하요.”

그러면서 싱글벙글 웃어대는 정우성의 표정이 그렇게도 해맑을 수 없다. 기가 막혔다. 선민이는 우성이의 아들이다. 때가 되어 대학을 들어가긴 했으나 한 학기를 끝내자마자 등록금 문제 때문에 휴학을 하고, 또 휴학을 하다가 지금은 군청에서 대체복무 중인 이를테면 군인 신분이었다. 군청 근무를 하다 보니 주야간 교대 근무를 하는 까닭에 주말이나 휴일에는 식당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일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돈이 꽤 된다나 어쩐다나. 그 중에 일부를 풀어서 자기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를 위해 장어구이를 사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야, 벼룩에 간을 내먹겠다. 이런 못난.”

“아니여, 선민이가 나보다 현금이 더 많다니까.”

“지랄도 가지가지로 한다.”

나는 그렇게, 정우성이를 잔뜩 혼내 주었다. 그러자 정우성이는, 자기가 정말로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깜빡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한참을 헷갈려 하다가는 우물쭈물 입을 닫고 말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작업을 끝내고, 그리고 헤어졌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문득 그른 의문이 들었다. 야 이거 내가 잘못한 거 아닌가?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았다. 선민이가 사 주는 장어구이를 나는 맛있게 먹었어야 하지 않을까? 맛있게 먹고, 더 사 달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선민이는 아마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을 것이다. 자기가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에게 장어구이를 사 드렸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거기에서 나온 기쁨을 양분으로 활기차게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 착한 선민이의 자랑할 기회를 박탈해버린 셈이다. 이런, 이런 못난.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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