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한상봉 칼럼

ⓒ위클리서울/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가톨릭일꾼 한상봉]  세월이 이리도 빠른가 싶다. 어제 일인 듯 아직도 뼈에 저리고, 여전히 핸드폰에 남긴 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를 듣기 힘든데, 그게 2014년이고 지금이 2019년이다. 그 많은 시간을 우리는 눈물겹게 넘겨 왔다. ‘촛불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는 수장된 세월호 희생자들의 억울한 이름들이 있다.

그동안 촛불은 광화문에서 서초동으로 옮겨 왔지만, 세월호의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그 사이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바뀌었어도 세월호의 눈물은 충분히 닦아내지 못했다. 100일 넘게 강남역 CCTV철탑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처럼, 세월호는 아직도 ‘사실상’ 진도 앞바다에 잠겨 있는 셈이다.

세상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자한당의 목소리가 아직도 쟁쟁하게 허세를 부려도 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이번 조국장관 수사에서 보여주었듯 검찰이 공정하다면 세월호 참사 책임자들에 대한 대규모 압수수색과 신속하고 광범위한 수사를 반드시 해야한다.”고 호소한다.

우리들이 딴 생각하면서, 벌써 세월호는 다 해결된 과거 문제처럼 착각하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세월호 이야기가 이젠 부담스럽고 낯설게 느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2014년 세월호는 1980년 광주만큼 오래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있는지 묻는 원형적 사건이다. 나 자신에게 서러운 공감과 불편한 연대를 감당할 마음이 있는지 묻는 신학적 사건이다.

이참에 세상의 아픔에 대한 위로와 연대 사이에서 제대로 답변하는 방법을 고민해 본다. 우연히 최근에 팟캐스트 방송 <신형철의 문학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거기서 가수 윤상을 만났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2014년 9월 17일에 발매된 윤상의 싱글앨범에서 <나를 위로하려거든>이라는 노래를 술을 마시면서 울면서 사오십 번 내리 들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그해 4월 16일에 발생한 비극에 대하여 어찌해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때 너는 어디 있었냐고
나는 또 내게 묻는다
왜 너의 곁을 지키지 못했는지
그걸 묻고 또 묻는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
이겨내라는 말
가시처럼 나를 찌르는 말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둬
난 지금 세상을 잃었으니
전부 가진 줄 아는 자에겐
잃을 게 너무 많아서
이 세상을 다 잃은 슬픔 같은 건
쳐다보려 하지 않아
이제는 잊으라는 말
잊혀진다는 말
백지처럼 그저 뜻 없는 말
제발 날 울게 내버려 둬
정말로 날 위로하려거든
날 그냥"


신형철은 이 노래에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때 너는 어디 있었냐고, 왜 너의 곁을 지키지 못했는지” 스스로 묻는 유족들의 ‘자책’이다. 유족들의 슬픔 속에서 이 자책의 감정은 가장 치명적인 힘을 발휘한다. 쓰시마 요코(津島佑子)의 작품 <슬픔에 대하여>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슬픔이란 스스로 가여워하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스스로 가여워하려면 스스로 용서해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쉽게 슬퍼할 수도 없다.”

그때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직 슬퍼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기에 쉽게 슬퍼하지도 못한다. 먹먹하고 아득하고 난감할 뿐이다.

두 번째는, 위로가 될 수 없는 말이 참 많다는 것이다. 그런 말들은 “가시처럼 나를 찌르는 말”이고 “백지처럼 그저 뜻 없는 말”이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 이겨내라는 말, 이제는 잊으라는 말, 잊혀진다는 말이다. 듣기 좋은 말이지만, 당장 슬픔에서 헤어 나올 힘도 생각도 없을 만큼 아픈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다. 여기서 신형철은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현암사, 2012)에 나오는 이 말을 떠올린다.

“위로를 하려거든 밧줄의 한쪽 끝을 내가 붙잡은 상태에서 밧줄을 던져야 한다.”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밧줄을 통째로 던져버리며 하는 말은 헛된 울림이다. 한 끝을 놓아버리면서 나아질 거야, 잊혀질 거야, 하며 밧줄을 던지는 것은 무의미한 말들이라는 것이다. 위로는 하지만, 연대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나누어 가질 생각도 없고, 함께 비를 맞을 용기도 없이 던지는 말은 사실 ‘자기 자신만을 위로하는 말’이다. 나를 비껴간 불행에 안심하며 타인의 불행에 안타까워 하는 발언이다. 그뿐이다. 그는 한걸음도 고통받는 이의 심장에 다가서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위로의 말은 가시에 되어 어쩌지 못하는 슬픔에 잠긴 이에게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한다.

세 번째,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잃을 것이 너무 많아서, 한 두 개 정도 잃어버려도 참을만하고, 심지어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허나, 그 아이가 세상의 전부였던 부모에게 아이의 죽음이란 세상을 다 잃은 슬픔이다. 그러니, 이런 이들에겐 위로가 불가능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끝없는 슬픔을 끝없는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온전한 사랑이 한정 없는 것이듯이, 끝없는 슬픔 역시 바닥을 모른다. 다함없는 슬픔은 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슬픔과 사랑은 함께 인간의 영혼 한가운데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으니. 그러니, 정말로 누군가를 위로하려거든 제발 그냥 울게 내버려둘 수밖에.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사랑 안에 머물도록.

밧줄의 한쪽 끝을 붙잡는 것이 ‘연대’이다. 그 손끝에서 내미는 온기가 위로가 되고, 슬픔에 젖은 이의 어깨를 들어올리는 연대에서 사랑은 완성된다. 이때 복음이 선포될 뿐 아니라,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서 조금씩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상처가 아물어도 상흔은 남아 있는 법이다. 그 상처가 아름다운 무늬로 바뀔 때까지, 그 무늬마저 희미해지더라도 세월호는 잊을 수 없다.

세월호에서 김용균으로, 김용희로 이어지는 그 참담한 비극은 가난한 이들에게 ‘아직 나라 없음’을 거듭 새삼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기 땅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거듭 새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희는 나의 백성”임을 알려주신다. 
 

<한상봉님은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이면서 ‘가톨릭일꾼’ 편집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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