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점수로 인생 결정짓는 게 아닌데…
시험 점수로 인생 결정짓는 게 아닌데…
  • 류지연 기자
  • 승인 2019.11.1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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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류지연의 중국적응기 '소주만리'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내 나이 38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안정적인 한국생활을 뒤로 하고 타국에서 하루아침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준말) 신세가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아프리카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중국이라는 나라,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38살 아줌마의 중국 체험기, 지금부터 시작해본다.

 

소주대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중간고사. 자매품 기말고사. 무려 14년간 잊고 살았던 이름들을 소주대에 와서 다시 접하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소주대학교 어학당에서는 일반 대학교와 같이 학기당 두 번의 시험을 치른다. 2단계 반의 시험 종목은 두 가지. 말하기(口语, kǒuyǔ)와 종합(综合, zōnghé-읽기/쓰기)이다.

시험 종목을 막론하고 근 10년간 치른 시험이라고는 몇 번의 토익과 운전면허시험, 전화영어 테스트가 전부. 오랜만에 치르는 중간고사가 상당히 긴장됐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매일 밤 아이가 잠든 이후에야 숙제를 시작하면 두 과목의 숙제를 끝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에 쫓겨 그간 제대로 된 복습을 하지 못했다. 목, 금 양일간의 시험을 앞두고 전 주 주말이 되어서야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처음으로 소주대 도서관을 방문해 보았다. 대학이든 공부든 워낙 오랜만이다 보니 어학생 신분으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아 수업단체방에 물어보고서야 용기내서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몇 시간 공부하다 알게 된 거지만 열람실 좌석을 시스템으로 예약 후 써야 하는데, 어학생의 학생정보로는 시스템 등록이 불가능했다. 간간이 빈 좌석이 있었기에 메뚜기를 뛸 수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소심해지는지 눈치를 보며 공부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녁까지 도서관서 보내리란 야심찬 계획을 수정해서 집 근처의 커피숍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나마 마음이 훈훈했던 점은 단체방에 재차 도서관 좌석 등록에 관한 질문을 올리니 다른 학생들이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건물의 열람실이나, 자기가 알고 있는 공부하기 좋은 빈 강의실을 알려줬다는 것이다. 기말고사 때는 이 정보들을 꼭 활용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분명 머릿속으로는 주말 내내 공부하면 근 한 권 분량인 시험범위를 두어 번씩은 훑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38세의 두뇌활동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보다. 주말 이틀 동안 책의 1/3 정도를 읽었을 뿐이다. 평일에는 공부할 짬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하니 과장을 조금 보태 눈앞이 아찔하고 입에 침이 마른다. 일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시험을 보면서 시험은 무조건 잘 봐야 한다는 주입식 사고와 강박관념에 길들여진 탓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주대 시험이 있는 이틀간 아이의 학교는 뜬금없이 휴일이란다. 교사들을 위한 ‘Professional Learning Day’라고 하길래 이름만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재량휴교일이 아닐까 했다. 휴일 전날 학부모 상담차 학교에 들러보니 선생님들은 이틀 내내 출근한단다. 복도며 로비 등 환경미화가 한창인 걸로 봐서 그저 쉬어가는 날은 아니란 걸 알겠지만 왜 꼭 학기 중에 이런 날이 삼일씩이나(학교 휴일 전날은 담임교사가 종일 학부모 상담하는 날이라며 하루 쉬었다) 있는지 야속할 뿐이다.

아이를 맡길 데가 없으니 시험 당일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아이가 얌전히 잘 앉아있을지,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만전을 기하고자 아이가 조용히 컴퓨터를 볼 수 있도록 미리 징동(京东, jīngdōng: 타오바오와 함께 중국 온라인쇼핑몰의 양대산맥)에서 무선헤드폰도 사두었다. 중국 최대의 쇼핑명절이라는 광군제(11월 11일, 중국 최대의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타오바오 운영사)가 2009년 싱글들을 위해 처음 시작한 대대적인 온라인 할인행사)가 다가오고 있어서 평소보다 싼 가격에 헤드폰을 살 수 있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첫날은 말하기 시험이라 다행히 시험 시간이 짦다.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섯 개의 문장 읽기, 두 개의 질문에 답하기, 두 명씩 짝을 이뤄 판매원-고객 간의 대화를 주고받기다.

요즘 들어 느끼지만 아무리 중국에 살고 있더라도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중국말을 연습할 기회가 딱히 많지 않다. 물론 시장이나 상점 등에서 중국말을 쓰게 되지만 대개의 경우 (주문, 가격 묻기, 계산 따위의) 단순한, 반복적인 대화 패턴을 사용할 뿐이라 딱히 중국말이 늘지 않는다. 이전에는 회사에서 유학을 다녀온 이들에게 언어가 많이 늘었냐고 물어봤을 때 별로 늘지 않았다고 하면 내심 속으로 비웃었는데, 막상 내가 똑같은 처지가 되고 보니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바뀐다’는 말이 떠오른다.

쉽게 말하자면 말하기 시험에서 엄청 긴장을 했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더듬거렸다는 뜻이다. 시험은 인당 5분 정도가 소요됐는데 내 경우 단어가 제대로 생각나지 않아 문장을 생각보다 더 짧게 끊어 3분도 안 걸린 느낌이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아이가 잘 기다려준 것은 다행인지라 상으로 아이스크림을 한 개 수여하고 그날 남은 시간은 실내놀이터에 가서 원 없이 놀게 해주었다.

다음 날은 종합 시험이었다. 객관식/주관식/120자 내외의 작문이 골고루 섞인 시험이었다. 총 90분의 시험 시간이 꽉 차게끔 문제 개수가 많았다. 독해 문제를 제외하고는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전날 말하기 시험으로 우울했던 마음에 희망을 채울 수 있었다. 다만 아이의 평온한 기다림을 위해 힘들게 짊어지고 간 노트북컴퓨터가 막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시험 시작 전 매우 초조했던 게 옥에 티였다. 결국은 노트북 대신 전화기를 쥐여 주고 시험 시간 내내 VPN이 제대로 작동하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시험을 시작했다. 중간에 한두 번 고비가 왔지만 예상보다 훨씬 얌전하게 아이가 기다려줘서 무사히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사진제공)소주대학교 孙梦桐(sūnmèngtóng) 선생님
종합 시험에 집중한 필자 반의 학생들. 나이와 국적이 다양한 총 25명의 학생들이 시험을 치렀다. 사진제공)소주대학교 孙梦桐(sūnmèngtóng) 선생님
종합 시험에 집중한 필자 반의 학생들. 나이와 국적이 다양한 총 25명의 학생들이 시험을 치렀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사진제공)소주대학교 孙梦桐(sūnmèngtóng) 선생님

시험이 끝난 후의 후련한 마음을 어느 것에 비할 수 있을까. 대학 시절, 시험이 끝나면 동기들과 밤새 술집을 전전하며 꼴딱 날밤을 밝혔던 추억이 떠오른다. 추억과 현실의 차이점은, 38세의 체력은 시험이 끝난 불금 저녁임에도 밤 10시부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는 점이다. 그래도 시험 걱정, 숙제 걱정 없이 주말 이틀을 푹 쉴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 가니 벌써 시험점수가 나왔다. 말하기/종합 두 과목 모두 1등은 교환학생으로 온 한국인 여학생이 차지했다. 내 점수는 두 과목 다 90점 이상으로 상위 20프로 이내에 들어 나쁘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기분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과 더불어 행운이라는 추상적인 형상을 점수라는 객관적인 척도로 환산해서 받아보게 되는 시험이라는 제도. 공정하면서도 동시에 잔인하기도 한 제도라 생각이 든다. 한 번의 시험이 응당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입시제도 하에서 한 번의 시험이 인생을 결정짓는 것 마냥 배워왔고, 알아왔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다만 그 깨달음은 여전히 소수의 목소리에 머무른다는 게 아쉽다.

점수에 연연하기보다는, 중국어 말하기에 좀 더 자신감을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생각해보면 두 달 전 처음 소주대 수업을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내용을 배웠고, 수업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 격언 중에 ‘好好学习天天向上’(hǎohāo xuéxí tiāntiān xiàngshàng, 열심히 공부해서 날마다 향상한다)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한 공부가 되도록 해야겠다.

 

마오쩌둥 시대의 ‘好好学习天天向上’ 사진들, 첫 사진 윗부분의 마 주석 어록에는 ‘학생들도 이러하니, 학업을 위주로 하여 다른 것을 겸하는데, 글뿐만 아니라 일과 군대도 배워야 하고 자산 계급도 비판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출처)바이두
마오쩌둥 시대의 ‘好好学习天天向上’ 사진들, 첫 사진 윗부분의 마 주석 어록에는 ‘학생들도 이러하니, 학업을 위주로 하여 다른 것을 겸하는데, 글뿐만 아니라 일과 군대도 배워야 하고 자산 계급도 비판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출처)바이두

<류지연 님은 현재 중국 소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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