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사랑의 끝은 어디인가
끔찍한 사랑의 끝은 어디인가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9.11.15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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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열매단풍 파라칸사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단풍의 계절이다. 단풍, 이 단어를 가만히 음미하고 있노라면 내 마음에서 눈물이 찔끔, 한다. 단풍을 얘기할 때의 풍자는 나무에 바람이 붙은 (楓)것이니, 사람들은 아마도 옛날옛적 그러니까 상형문자를 만들어내던 시절부터 단풍을 보면 화려해서 덧없다, 혹은 속절없다, 바람에 곧 날려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찔끔찔끔 짜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서글프게 화려한 단풍의 계절에 나는 결국 고양이 어미와 그 새끼들의 밥 주기를 거부하기로 했다. 하루아침에 감정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장장 구십여 일 동안이나 그 끔찍한 장면을 지켜본 뒤에 내린 결정이다. 가슴이 아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으로 치자면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새끼 고양이들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다는 사족 하나를 미리서 붙여둬야겠다.

끔찍, 이 단어는 대단히 오묘하다. 끔찍만큼 복합적으로 중의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의 현장을 얘기할 때도 사람들은 ‘끔찍’하다 하고, 자식을 품에 안고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게 하는 여인의 과도한 자식사랑을 묘사할 때도 사람들은 ‘끔찍’이란 단어를 쓴다. 남자를, 혹은 여자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끝내는 그 성기나 혹은 신체의 일부를 잘라낸 사람을 얘기할 때도 당연히 ‘끔찍’이란 단어는 들어간다.

그런데 갖고자 하는 마음과 사랑의 마음은 같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알지만 나 자신의 문제가 되고 보면 소유의 욕망은 곧 사랑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지점에서부터 파괴와 자폭은 시작된다.

이른바 재벌이나 유명 인사들의 자녀들이 마약 같은 것에 곧잘 빠져드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머리를 싸맬 필요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랐고, 만들어졌다. 없는 것이 없어서 무엇이라도 할 것 같고, 그래서 세계 평화라든가 인류의 화해 같은 보람찬 일에 관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그런 거대담론에 관심을 갖기에는 그 부모들이 그런 그릇을 안 만들어주었다. 자식의 건강한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안 하거나, 한다 해도 기껏 유리구슬 안에 궁전이나 지어주는 정도의 그릇밖에 안 되는 부모를 둔 젊은이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 돼버린 시대를 나는 지금 살고 있으니, 슬프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집의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그렇게 망가뜨려 가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것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아내기까지 장장 구십여 일이 걸렸으니, 나도 해볼 만큼은 해본 셈이다.

거리를 떠돌던 고양이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얻어먹고 눌러앉아 수컷을 끌어들이고 연애를 해서 새끼까지 낳은 횟수를 굳이 헤아리기로 하자면 무려 다섯 번이었다. 한 마리는 젖먹이 새끼를 두고 사라져 버려서 고양이 전용 분유를 사다가 먹이는 등 난리법석을 떨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다들 그런대로 착실하게, 상식적인 육아를 해서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이를테면 사람이 새끼를 만지고 쓰다듬고 별 짓을 다해도 어미는 그저 보람찬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을 뿐, 내 새끼를 왜 인간 니들이 만지고 지랄이냐는 식의 짜증을 내지는 않았고,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새끼를 입에 물고 어디로 숨어버리지도 않았다.

 

꼭꼭 숨겨놓은 새끼들
꼭꼭 숨겨놓은 새끼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 뒤에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 뒤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런데 다섯 번째 이 녀석은 그게 아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새끼를 낳았던 첫날 만져보자고 손을 내미는 순간 녀석은 카, 소리를 내면서 내 손을 칵 깨물어버리고 있었다. 첫날은 그나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새끼 한 마리가 거꾸로 나와서 죽어버린 충격 때문이려니 싶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안쓰러워서 쓰다듬어주려 하니 그 손마저 물어버린다.

어라 이 녀석 봐라. 되게 까칠하네 거, 어쩌고 중얼거리며 물그릇을 씻어서 새 물을 떠다주고, 밥이나 넉넉하게 주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두 시간 쯤 뒤에 밖으로 나와 보니, 어렵소, 고양이가 사라졌다. 어미만 사라진 게 아니다. 걷지도 못 하는, 눈도 안 뜬 새끼도 사라졌다.

황당한 심사로 온 사방을 뒤지고 다니기를 얼마나 했던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토방에 우두커니 퍼질러 앉아 있는데 어미가 나타났다. 아마도 배가 고파서 기어 나왔던 것인지 ,녀석은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만 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또 한 번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마당으로 내려가서 다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무래도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느낌이어서 나는 짐짓 못 본 체 외면을 하고, 나중에는 아예 방으로 들어가서 몰래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느긋하게 꼬리까지 흔들어대며 모퉁이 쪽으로 간다. 녀석이 마당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와서 살금살금 발소리도 안 나게 애를 써 가며 모퉁이 쪽으로 갔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들었다. 어미 고양이가 마치 곡예사처럼 장작더미를 타 오르고 있었고, 기척을 느낀 새끼들이 잉잉, 소리를 내고 있었었다.

화목난로용 장작더미 위에 보온덮개를 올려뒀었는데 어미가 보기에 그곳이 아마 육아를 하기에 맞춤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곳은 각도 상으로 볼 때 방안에서 엿보기에도 딱 좋았다. 그리하여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틈으로 엿보기를 시작하는데, 어미는 내가 엿보는 줄도 모르고 혀를 날름날름 해가며 새끼 두 마리의 똥오줌을 먹어 치우는 한편 온 몸을 핥아대느라 정신이 없었고, 새끼들 또한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앵앵 소리를 내 가며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뒤집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것들 참.”

나도 모르게 한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들켰다. 수상한 소리를 감지한 어미 고양이는 즉각 새끼들을 타고 올라앉아서 좌우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나는 미처 숨을 겨를도 없이 어미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어미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벌떡 일어서더니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이빨까지 드러낸 채로 카아, 카아, 소리를 내서 나를 위협한다. 듣기에도 섬뜩한 그 공격적인 소리에 놀란 나는 후딱 몸을 감추기는 했지만, 용솟음치는 호기심을 어쩌지 못 하고 두어 시간쯤 지난 뒤에 다시 엿보기를 시도하다가 또 들켰다.

저놈의 인간 등살에 새끼도 못 키우겠다고 생각한 고양이는 아마도 그날 밤 늦게, 아니면 새벽쯤에 새끼를 입에 물고 육아방을 또 어딘가로 옮겼을 것이다. 초저녁에 밥 먹기를 끝낸 어미가 장작더미 쪽으로 가는 것을 내가 분명히 보았고, 아침 일찍 장작더미 앞의 문틈으로 엿보기를 시도한 내 눈에 어미도 새끼도 아무도 없었으니, 어미는 내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재빨리 이사를 감행한 것이 분명했다.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빠지기 시작했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아직은 뭐가뭔지 어리둥절
아직은 뭐가뭔지 어리둥절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나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또 어쩌지 못하고 천지사방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다가 그만 포기하고 어미가 자발적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다렸다. 사람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녀석은 배가 고프면 어쩌지 못하고 돌아올 터이었다. 녀석은 오전 한나절이 다 지나도록 코빼기도 안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슬슬 불안에 빠져갈 즈음 마침내 돌아와 주었다.

내가 방에서 엿보고 있는 동안 녀석은 허겁지겁 정신없이 밥을 처먹고, 물도 처마시고,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선뜻 나갈 생각을 안 하고 마당을 서성거리기만 한다. 그렇다고 녀석을 곱게 보내기만 할 나도 아니어서, 아예 숨소리도 안 내겠다는 생각으로, 극도의 인내심을 다해서 훔쳐보기를 되풀이한 결과 드디어 녀석의 행선지를 알아내기에 이르렀다.

어미 고양이가 새로 차린 육아방은 옆집이었다. 옆집은 광주에 사는 사람이 별장처럼 가끔 와서 노래나 부르다가 떠나는 집이었고, 빈집이나 다름없으니 어미 고양이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봐줄 만했다. 하지만 평화는 사흘만에 끝났다. 주인이 와서 풀을 벤다고 예치기를 등에 메고 하루 종일 윙윙 소리를 내고 있으니, 보나마나 어미는 아마 난리를 당하는 심사였으리라. 나는 속으로 깨소금다 요놈아, 하면서도 불안해서 주인에게 얘기나 해야겠다 하고 나가는데 세상에, 어미는 어느새 새끼들을 물어서 데려다놓고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옮겨 왔는지, 다른 어디에 새끼를 감추지도 못 하고 맨 처음 지가 새끼를 낳았던 토방의 집 안에서 새끼들이 고물거리는데 그것 참, 볼 만했다. 볼 만해서 만져보고 싶었지만 어미가 무서워서 차마 손도 못 내밀고, 그저 보기만 했건만, 어미는 아마 그런 꼴조차도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밖으로 나가 보니 예상했던 바 그대로 새끼들은 이사를 떠나고 없었다. 이번에는 모퉁이 쪽의 장작더미가 아니라 새로 지은 집 뒤의 창고에 쌓아둔 장작더미 속이었다. 새끼를 만져보는 것은 고사하고, 눈으로 보는 것조차도 용납을 못 하겠는 어미 고양이의 메시지에 나는 매우 심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은 있어서 입으로는 그래 안 본다, 더러워서 안 본다 짜샤, 어쩌고 그런 속절없는 기염은 토하고 있었다.

어쨌든 어미 고양이의 사서 하는 고생은 그 뒤로도 계속, 쭈욱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새끼들은 눈을 떴고, 아장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새끼들이 걷기 시작하면 어미의 쓸데없는 집착과 경계심도 사라지려니 했지만, 아니었다. 어미는 오히려 정신없이 바빠졌다. 새끼들이 툭하면 밖으로 나가려 하니, 어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가도 사람 그림자만 느껴지면 후다닥 새끼를 안으로 몰아넣고, 사람을 향해서는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카악, 카악 소리를 질러내는데 그것 참, 환장하겠다. 심지어는 밥을 주려고 다가서는 사람한테까지도, 새끼들이 옆에 있을 경우에는 카악, 카악, 공격적인 소리를 내니 이게 대체 뭔 꼴이란 말인가.

어미가 그렇게도 사람을 못 믿을 종자로 규정하고 기척만 나면 전투모드를 취해대고 있으니 새끼들인들 어련할까. 처음 눈을 떴을 때는 나를 보고서 신기하다는 듯이, 저 동물은 대체 뭐냐는 듯이 눈이나 깜빡깜빡 해대던 새끼들이 차츰 나를 경계해서 숨어드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내가 왜 숨어, 저걸 잡아야지, 하는 투로 돌아서서 지 어미가 하는 바 그대로 카악, 카악,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그러다가 다시 홱 돌아서서 냅다 달아나 버리곤 한다.

 

이때가 좋았지.
이때가 좋았지.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이때까지도 좋았고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뿐만이 아니다. 새끼들 노는 장면이 멀리서 얼핏 봐도 그렇게 귀엽고 정겨울 수가 없어서, 조금만 더 가까이 가서 엿보고자 하면 어찌 그렇게도 귀신처럼 알아차리는지, 눈에 불을 켜고 나 있는 쪽을 노려보며 쉭쉭 하고 마치 독사가 공격모드를 취할 때의 그것 같은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도 섬뜩하게 위협적일 수가 없다. 내가 내 힘으로 돈을 벌어서 지들 밥을 사다가 주는데 나를 이리 대해도 되는 것이냐?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워서 애꿎은 하늘을 보며 투덜거린 게 몇 번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밖에 멀리 작업을 나갔다가 마당으로 들어설 때의 기분은 정말이지 지랄 같다. 집에 사람이 없으면 어미와 새끼들이 마당으로 나와서 마음껏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논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한다. 목격하는 순간 어미 고양이가 먼저 카악,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뒤를 이어 새끼들이 이구동성으로 카악, 소리를 내며 공격 자세를 취해 보이고,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다. 이게 뭐냔 말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주는 밥은 잘도 처먹어댄다. 물론 내가 있을 때는 접근도 안 한다. 밥그릇에 밥을 쏟아놓고 돌아서면 슬금슬금 다가오고, 내가 완전히 사라지면 장난까지 쳐가며 그 밥을 다 처먹는다. 이런 싸가지 없는 녀석들의 식량을 내가 계속 공급해야 하나?

안 할란다. 이제 그만 포기할란다.

이런 결정을 하던 날 어미를 불러 앉혀놓고, 보다 정확하게는 혼자서 물을 먹고 있는 어미에게 내 생각을 큰소리로 말해주었다.

“새끼를 힘차고 씩씩하고 활기차게 키워서 자립할 수 있게 해야지 말이야. 네 녀석처럼 그렇게 새끼를 무슨 재산이나 보물로 파악해서 숨겨놓고만 있으면 어쩌란 말이냐. 생각 좀 해봐라 이놈아, 만약에 네 녀석의 신변에 뭔가 이상이 생겨서 새끼를 보살필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어쩔 것이냐. 사람 그림자만 봐도 숨어버리고,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기함을 해서 달아나는 것밖에 모르는 새끼들이 어찌 살아갈 것이냔 말이다.”

나의 이런 잔소리를 어미 고양이가 듣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당연하게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다만, 일종의 넋두리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사흘이나 지났나? 어미와 새끼가 통째로 사라졌다. 지들이 배고프면 돌아오겠지, 하고 느긋하게 상황을 주시했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고양이는 요물 중에 요물이라는 누군가의 말이나 되새기고 있을 따름이니, 또 한 번 이게 뭔가 싶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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