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뉴스지금여기] 박병상의 ‘시사비평’

ⓒ위클리서울/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가톨릭뉴스지금여기 박병상]  올 김장은 언제 담글 거라고 아내는 일찌감치 못 박아 놓았다. 해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하기만 했다. 마무리된 뒤 집에 들어와 겉절이를 맛보았는데, 올해는 시간을 진작 알려준 거였다. 지금 이 시간에 장모와 아내, 그리고 작년에 이어 막내아들이 분주하다. 절인 배추에 양념한 속을 비벼 넣는다. 내년 초여름까지 밥상을 포기김치가 알차게 장식할 것이다.

내심 마음 단단히 먹었어도 이번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시간을 비워 두려고 지나치게 무리했나 보다. 기존 일정에 추가로 새벽 약속이 연이틀, 마다하지 않았더니 그만 감기몸살이 왔다. 하필 김장 전날. 못 이기는 양, 또는 자청하며 앞장서던 2차 3차를 마다하며 이른 시간 몸을 덜덜 떨며 집에 도착했지만 준비 과정을 외면해야 했다. 들어서자마자 이불 속에 들어간 나를 아내는 늦도록 깨우지 않았다. 마침 집에 온 큰아들이 힘 들어가는 일을 후다닥 처리해 놓고 나갔고 막내아들이 40포기에 들어갈 김칫소를 손쉽게 버무린 모양이다. 마감 앞둔 원고를 쓰는 이 시간, 아내는 간간이 잔심부름만 부탁하면서 김장을 마무리한다.

아이 둘이 대학을 들어간 이후 수능에 도무지 관심을 두지 못한다. 아니 아이들이 어떻게 대학에 입학했는지조차 잘 모른다. 다만 표창장 없이 입학하고 졸업 또는 자퇴한 이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미더웠다. 과정에서 다가오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대견할 따름인데, 그건 또래 남편들이 대개 그렇다. 그런 남편들은 김장 김치를 맛있게 먹을 뿐 조합을 이루는 재료의 오묘함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짐작할 생각도 한 적 없을 게 분명하다.

지면이나 강의에서 우리와 세계의 다채로운 음식문화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처지에서 정작 1년 중의 큰 대사인 김장에 참여하지 못한 이중인격을 모면하려 했지만 늦었다. 이젠 방해가 되는 존재가 되었지만 잔심부름하면서 눈동냥 했다. 말로 쉬운 농민과 어민의 땀방울이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 김장 김치에 우리 농민과 어민의 땀이 버무려진다. 100여 가지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재배한 것일까? 생산에 관계한 농민은 얼마나 될까?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정다은 기자

무채와 고춧가루만이 아니다. 파, 마늘, 새우젓과 굴, 그리고 더 들어갔다. 매실청, 배즙, 더 무엇이 있었는데 조금 전 일이지만 기억이 어렵다. 채로 썰기에 충분히 재배한 무는 배추와 더불어 유기농산물이다. 어릴 적 김장은 어느 이웃이 생산했는지 아는 농작물을 사서 담았지만 지금은 생활협동조합이 연결해 준다. 누가 재배했는지 몰라도 생활협동조합을 신뢰하기에 산 무와 절인 배추는 건강한 땅에서 봄부터 흘린 땀이 배었을 것이다. 새우젓과 굴도 새벽에 출항한 어민의 손에 어린 마음이 오롯하게 담겼겠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양념과 젓갈이 빚어내는 맛도 다양하다. 인천 앞바다가 제 모습을 간작하던 1960년대, 담벼락 높이로 쌓아 놓은 배추를 절여 놓고 이웃이 모여 김장할 때 우리 꼬맹이들은 그저 축제였다. 어른들도 같은 마음이기에 분주해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을 그 시절, 인천의 김장에 토막을 낸 어린 갈치가 갖은 양념과 더불어 버무렸다. 김치 사이에 드러나는 졸깃한 갈치의 맛은 지금도 뇌리를 자극하지만, 요사이 고급이 된 갈치는 갯벌이 사라진 인천에서 알현하기 어렵다.

"요리를 욕망하다"에서 마이클 폴란은 발효식품을 이야기하면서 김치를 예로 들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마이클 폴란의 글은 언제나 생생한 진정성을 표현하는데, 100여 가지 김치는 “손맛”이라는 이현희 씨의 말에 받은 무한한 감동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손맛? 처음 그 말뜻에 아리송했지만 손맛은 “사랑의 맛”이라는 의미를 되새긴 것이다.

어릴 적 커다란 배추 200포기 이상 담았던 김장은 요즘 20포기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 담은 40포기 김장의 일부는 장모가, 더 조금은 큰애가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5개월 가까이 우리 식탁을 든든하게 지켜 줄 것이다. 큰일을 마친 아내는 내가 원고를 마칠 즈음, 편안해진 마음으로 겉절이를 내놓겠지. 1년을 준비한 관현악 공연을 마친 지휘자의 마음이 그렇겠지. 갯벌을 화려하게 매립한 인천에서 펼친 올해의 음식문화 종합예술, 김장김치 담기를 마무리한 시간, 이 아름다운 종합예술이 내내 지켜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박병상님은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