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 채드윅 지음/ 박다솜 옮김/ 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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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뮤즈에서 예술가로'는 제1,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격랑의 시대에 싹튼 초현실주의, 그 안에서 오직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로서만 존재하기를 강요받던 여성들이 개인적, 직업적으로 더 성숙하기 위해 어떻게 고투했고, 서로의 지지자로서 예술성을 발전시킨 과정을 깊이 있게 연구한 휘트니 채드윅의 역작이다.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풍부한 도판과 함께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 책의 무대인 20세기는 전쟁의 시대이자 혁명의 시대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간 이성이 어둠을 밝혀 삶을 낙원으로 인도하리라는 의기양양한 선언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술의 산물인 전투기, 탱크, 기관총 그리고 독가스가 수천만 명의 인명을 앗아가고 문명의 기반을 죄다 파괴하고 만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화가 트리스탄 차라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다다이즘' 운동을 선언한다. 이들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이성을 부정하고 우연성, 자발성, 즉흥성을 숭배했고 기존 부르주아 문화를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의 후계자로, 인간의 어떤 능력보다 상상력을 우위에 두고 정신의 해방을 추구했으며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의 숨은 진실을 드러내려 했다. ‘사랑과 해방의 운동’을 제시하며 초현실주의를 창시한 앙드레 브르통을 주축으로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이브 탕기, 롤런드 펜로즈와 같은 남성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초현실주의를 문학과 예술에 한정하지 않고, 윤리·종교·정치면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대한 수정을 가하는 하나의 ‘이즘’으로 추구한다. 초현실주의는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막을 내리면서 짧은 기간 예술사에 영향을 미쳤으나, 훗날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등의 바탕이 되었다.

참혹한 전쟁의 시기를 함께 건너온 여자들은 신산하기 짝이 없는 삶을 버티면서 끝내 살아남아 각자의 방식으로 초현실주의 서클의 일원으로서 반인륜적 전쟁의 잔혹함을 기록하고, 투쟁하며 예술가이기를 선언했다.​ 또한 ​초현실주의에 가담한 여자들은 예술 세계에만 머물기를 거부하고, 기존 체제의 파괴에 몰두한 다다이즘과 달리 초현실주의자들은 새로운 가치와 희망을 제시하려 했기에 사회혁명과 반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초현실주의, 동성 간의 우정과 제2차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많은 여자들의 삶과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 알리스와 발랑틴, 프리다와 자클린, 레오노라와 레오노르, 클로드와 쉬잔, 그리고 리에게 초현실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달랐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는 공히 뮤즈의 역할과 예술가의 삶, 이 두 가지 삶의 맥락을 규정했다. 초현실주의는 ‘자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예술가로서, 작가로서 우뚝 서고 더 넓은 세상에서 자기 작품을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지적, 정치적, 예술적 환경을 제공했다. 이 여자들 가운데 일부는 남성 예술가들의 삶에서 뮤즈의 역할을 받아들였으나, 뮤즈의 삶이 예술가의 삶을 능가한다고 믿은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한 여자들을 예술가로,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로 기억한다.

전쟁을 관통해 살아남은 이들에게 포성은 멎었다 해도 삶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전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정신적 충격이 사라지지 않아 방황했고 친구들은 죽었으며 삶의 터전이 바뀌었고 수십 년을 함께한 배우자와 이별했고 전쟁 전과 전쟁 중이던 시절과는 다른 새로운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럼에도 마침내, 유명한 남자의 뮤즈가 아닌 독자적인 여성 예술가로 자리매김 되었으니 고통스런 삶에서 나름의 보상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이후의 여자들은 이들을 롤모델로 삼아 나아갈 수 있었을 테니 이들 선구자들은 한 가닥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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