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유대칠 칼럼

ⓒ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가톨릭일꾼 유대칠]  마음이 무엇인가로 가득차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것만 보인다. 돈으로 마음이 가득한 이는 무엇이든 돈으로 보인다. 공부를 해도 돈 때문이고, 사람을 만나도 돈 때문이다. 결혼은 최고의 투자라는 광고 문구가 무섭다. 결혼도 결국 돈이다. 그들에게 돈은 세상의 유일한 기준이다.

마음이 ‘나’로 가득차면 ‘나’ 이외 다른 이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나’만 보일 뿐이다. ‘나 아닌 이들’이 ‘나’의 바로 옆에서 어떤 아픈 고난의 시간을 보내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나’로 가득차면 그냥 그리 된다. 겨우 보이는 ‘남’이란 이들은 ‘나’와 더불어 살아갈 우리 가운데 ‘너’가 아니라,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적으로 있는 ‘남’일 뿐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다르다. ‘돈’과 ‘나’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돈’이란 까닭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나’에게 무엇이 얼마나 좋은지 계산하며 살지 않는다. 그에게 세상은 이겨야 하는 남들로 가득한 힘겨운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우리 가운데 ‘너’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너의 아픔은 결코 남의 아픔이 아니다. 바로 ‘나’의 아픔이다.

마음이 비워진 이들은 이런 이들이다. 그들은 슬프다. 아프다. 직접적으로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너의 아픔들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비워진 마음을 아픔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이는 슬프다. 그러나 그 가난과 슬픔은 이 불행의 이유가 아니다. 바로 그 가난과 슬픔이 행복의 이유이고, 바로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은 이기는 행복이다. 누군가의 패배와 아픔을 보면서 그렇지 않은 나를 안도하고 그들을 이긴 성취감에 웃는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이는 오히려 이것이 부끄럽다. 남을 이기고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행복에 익숙한 자신이 부끄럽다. 남을 그저 자기 행복 수단으로 삼는 마음이 부끄러워한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부끄러워하는 이들이다. 어디서든 “나의 말을 들어라!”, “나의 생각만이 답이다!” 마음 가득한 ‘나’만을 주장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나’인 또 다른 ‘나’인 ‘너’의 아픔에 마음을 열어 듣는다. 그 아픔을 비워진 마음에 채운다. 그 아픔을 우리 가운데 나의 아픔으로 품는다. 그 아픔을 품은 우리는 그 아픔 앞에서 그저 머물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으며 이겨낸다. 희망은 바로 아픔 가운데 우리로 하나 된 바로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 마음이 가난한 슬픈 이들의 잡은 손이 바로 희망일지 모른다.

이 사회, 아직도 여러 슬픔들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부당한 대접 속에서 열심히 일하다 죽은 이의 그 아픔도 누군가에겐 그저 계산기로 계산되는 돈일뿐이고, 누군가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살 수 없는 지독한 아픔의 이유이기도 하다. 또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누군가 지독한 아픔 가운데 한번 도와 달라 눈물로 애원해도 비웃음으로 짜증내며 사라지거나 교활한 정치적 연기로 자신의 기득권만을 계산한다. 마음이 ‘나’로 가득한 이들이다. ‘나’뿐인 이들이다.

그들에게 ‘우리’의 아픔은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다. 겸손은 연기일 뿐이고, 그저 자기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과연 우리의 아픔을 모르는 이들, 오직 ‘나’로 마음이 가득한 이들, 그래서 그들의 밖 이 땅 수많은 깊고 깊은 울음을 들리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는 이들에게 우리의 희망을 의지해야 하는가?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아픔을 모르는 그들의 손에 달려있는가?

종교적 깊은 성찰은 뒤로 두자. 만삭의 어린 여인이 출산의 고통을 이겨 내며 출산의 장소를 찾고 있다. 자신의 방이라도 그 힘겨운 부부에게 잠시 내어 줄 이가 없다. 누구도 ‘나’ 아닌 이의 아픔에 ‘나’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자신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어둠 가운데 빛은 자신의 빛으로 다른 이를 본다. 그러나 감은 눈으로 살아가는 이들, 그저 자신의 욕심만 느낄 뿐, 아닌 이의 아픔은 보지 못한다. 빛 가운데도 산다 해도 눈 감은 이에게 세상은 어둠이다. 그렇게 아집 속에서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중요한 이들에게 힘겨운 마리아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에게 아기 예수의 자리는 없었다. 참된 희망의 자리는 있지 않았다.

감은 눈으로 ‘나’만을 고집하는 이에게 빛은 없다. 그런 이에게 사랑도 없다. 보지 못하는 이가 무슨 사랑을 하는가? 그저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아집의 사랑뿐이다. 그런 이의 신앙이 아무리 깊다 해도 그 신앙은 외로운 홀로 신앙일 뿐이다. 하지만 참다운 신앙은 홀로 신앙이 아니라, 뜬 눈으로 ‘우리’ 가운데 나 아닌 너와 손잡고 나아가는 더불어 신앙이 참다운 신앙이다. 나가 아닌 우리로 있는 신앙이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른 신앙인이라도 홀로 신앙으로 자기 욕심만 챙긴다면, 참 신앙인이 아니다.

아무리 법 공부를 많이 하고 높디높은 권력을 가졌고, 어느 신학교에서 글로만 신학을 공부하였다 해도, 그가 우리 ‘밖’ 오직 자기 욕심으로만 살아간다면, 설령 그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수일 동안 금식을 한다 해도 그것은 고난의 나눔이 아니다. 하느님은 더불어 신앙 속 마음이 가난한 이들, 그 비록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아무나의 고난이라도 그 고난 가운데 서로의 잡은 손에 다가오시는 분이시고, 이미 우리 모두와 더불어 있는 분이심을 믿는다. 서로의 아픔에 울고 있는 그 아름다운 울보들의 더불어 있는 자리에 다가오시는 분이심을 믿는다. 아니, 이미 그 자리에 더불어 울고 있으심을 믿는다.

<유대칠 님은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면서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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