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예전. 그러니까 내가 스물 하나였을 때 가출해서 깊은 산속 절에 들어가 있었을 때 이야기다. 금강산 제일 아랫자락이라던 그곳에는 겨울이면 눈송이가 아니라 눈뭉치가 하늘에서 내렸다. 주지스님이 유명한 분이셨는지 그 깊은 산골짜기까지 사람들이 꾸역꾸역 찾아왔고 때문에 나는 더 깊고 조용한 곳에 있는 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가출의 목적이 ‘세상과의 단절’이었기 때문이다. 주지스님은 “너 참 당돌하구나!” 하시며 깊은 산속에 지어진 암자를 통으로 내어주셨다.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단절된 그런 곳. 외로움과 고독이 이불과 요처럼 늘 내 곁에 깔려있었다. 밤새 눈이 내리면 암자는 눈 속에 포옥 파묻혀버린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내 키만큼 눈이 쌓여 밖으로 나가려면 두더지처럼 굴을 파내야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던 나는 천연덕스럽게 산 속 깊은 암자에서 첫겨울을 맞았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하늘에서 눈이 내려봤자 얼마나 오겠어…’라는 오만한 생각을 품고 살던 때였다.

절에서는 하루에 딱 세 번 밥을 준다. 새벽 같은 아침에 한 번.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또 한 번. 그리고 어스름한 초저녁을 끝으로 모두 세 번의 밥을 먹는다. 그 때를 놓치면 어디서도 먹이(?)를 구할 수 없다. 다람쥐처럼 숨겨놓은 도토리도 없는 나는 무조건 그 시간에 절로 내려가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밤새 눈 내리는 소리를 듣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내가 묵고 있던 암자는 눈에 통째로 파묻혀 있었다. 아침밥을 먹으러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나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는 눈 속을 파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몰라 일단 좌측 계단 쪽을 향해 파도 속을 헤엄쳐 나가듯 눈 속을 허우덩 거리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묶고 있던 절에는 산 위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바위를 보며 방향을 정확히 잡고나자 그때부터는 절을 향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며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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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온 날. 자동차 바퀴가 돌아 나간 자리에 두 개의 하트자국이 남았다.
첫눈이 온 날. 자동차 바퀴가 돌아 나간 자리에 두 개의 하트자국이 남았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암자에서 절로 내려가는 길에 아주 긴 계단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 몇 개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눈에 파묻힌 계단은 아득한 낭떠러지처럼 느껴졌다. 굴렀는지 파묻혀서 기어 내려갔는지 아무튼 한참을 허우적거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절 마당까지 내려와 있었다. 나는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한 마리의 굶주린 산짐승이었다. 아침공양 시간에 늦을까봐 서둘러 몸에 묻은 눈을 투닥 투닥 털어내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엔 주지스님과 또 다른 스님 두 분, 불목하니 아저씨와 보살님 그리고 군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보자 입을 딱 벌린 채 귀신을 본 사람들처럼 서 있었다.

저기 산 위 암자에 사람이 하나 갇혀있다.

이만큼 내린 눈에 학생 혼자 내려오는 건 불가능하다.

일단 눈을 치워내며 암자 쪽으로 올라가보자.

뭐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혼자 내려왔냐?”

주지 스님이 물으셨다.

“늦으면 밥 못 먹는다, 그 생각만 하면서 내려왔는데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따듯한 밥 한 끼. 따듯한 인생 한 그릇.
따듯한 밥 한 끼. 따듯한 인생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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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명란젓처럼 새빨개진 손가락을 뜨거운 국그릇에 녹여가며 먹었던 그날의 밥 한 끼는 내가 이때까지 먹었던 그 어떤 밥보다도 눈물 나게 맛있었다. 목숨 걸고 쟁취한 너무나 소중한 밥 한 끼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깊은 산 속까지 숨어들었지만 배고픔 앞에서는 그 어떤 고민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식욕 탱천한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만 나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나약한 거니까…. 그러니 배부른 고민은 이제 그만 하자.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눈 속을 파헤치고 나와 따뜻한 밥 한 끼 찾아먹듯 이렇게 또 하나씩 부딪히며 살아가면 되는 거야… 라고.

오늘은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다.

젊은 시절, 가출해 절에서 살았던 그때가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금의 내가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밥 한 끼에 목숨을 걸고 그토록 용감하게 눈 속을 파헤치며 내려올 수 있었을까. 무모하고 엉뚱하고 겁 없고 당돌했던 그 시절의 내가 오늘따라 무척 그리워진다.

며칠 전. 박주영 작가의 <백수생활 백서>를 읽다가 가슴에 와 닿는 글귀가 있어 살짝 접어놓았다.

“오늘과 내일이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삶을 살면서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힘든 상황에서도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곳이 있는 삶이 낫고, 그저 묵묵히 견디고 참아가면서 사는 것보다는 단번에 부수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삶이 낫다고 생각해.”

<박주영의 백수생활 백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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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접어놓은 페이지를 펴서 다시 한 번 읽어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용감한 것과 무모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후회를 남기지 않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답이 없는 물음에 정답 또한 있을 수 없듯,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부질없는 질문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등을 겪고 산다. 그러느라 하늘도 산도 나무도 구름도 달도 별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속에 갇혀 살다가 끝나 버리는 게 인생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눈 오는 날엔 눈을 보며 즐기고 비오는 날엔 비를 보며 즐기고 바람 부는 날엔 바람을 맞으며 즐기다 가고 싶다. 그렇게 살다가는 게 결국 따뜻한 밥 한 끼 맛있게 먹다 가는 인생으로 남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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