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대표-1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21세기 역사독립군’으로 불리는 전재진 대표(63)는 1993년부터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26년간 투쟁해 왔다. 지난 9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도 전 대표의 증거자료 덕분에 가능했다. 지금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다행히도 전국을 찾아다니며 우키시마호 생존자 82명의 증언을 영상으로 남겼다. 26년 전의 일이다. 동영상 촬영을 하며 당시 참혹했던 폭침현장과 일제의 강제징용 이야기들을 모았다. 동영상 104컷이 다큐 영화로 부활한 것이다. 이 자료는 지금 천안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74년 동안 해저에 수장된 우키시마호 영화가 전국 393개 영화관에서 개봉됐지만 역사 다큐 형식의 영화라 흥행이 저조했고, 한일관계 역사인식 격차가 컸다"고 말하는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대표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본래 그는 반핵-평화(反核-平和) 운동가였다. 그러던 그가 우키시마호 참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92년 일본에서 개최된 반핵평화포럼에서다. ‘로카쇼무라’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었는데 아시아 평화운동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때 우연히 일본 시모키타 지방의 한 향토사학자 ‘사이토 사쿠지’ 씨가 건네준 한국인 우키시마호 참사자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으려면 70여 년간 숨겨진 이 사건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우키시마호’ 진실의 문이 열리게 됐다. 피해자들과 함께 진상규명회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우키시마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알리는 한편, 향토사학자 사쿠지 씨를 초대해 피해자들과 진상규명을 위한 토론회 등을 가졌다.

일본은 지금도 우키시마호가 미군 기뢰로 폭침됐다고 말한다. “우키시마호 폭침은 일본 대본영의 ‘고의폭침’과 미군정의 ‘진상은폐’로 가려진 사건이다. 이를 증명할 일본 해군 승선자의 증언록도 있다. 그들을 국내에 초청해 증언대회도 가졌다. 우키시마호 참사 조사 자료집을 정부에 제공도 했다. 지난 2003년 평양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국제포럼에 초청받아 이를 알렸다. 북한은 ‘살아 있는 영혼들’이라는 우키시마호 영화를 제작해 대대적인 홍보를 했는데 북한 주민들은 이 사건을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고 회억한다.

“그러나 역대 정권마다 이 사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유해조사 발굴을 통해 수습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정부와 논의 중에 있다.”고 밝히는 전재진 대표를 수운회관 사무실에서 만나 74년간 베일에 가려졌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과 일본과 미국의 음모, 조선인 강제징용 등에 대해 들어본다.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우키시마호 영화 포스터 ⓒ위클리서울

- 지난 8월, 다큐영화 ‘우키시마호’가 개봉됐는데 관객반응은 어땠는가.

▲ 우키시마호 폭침은 1945년 8월25일에 일어났다. 무려 74년 동안 해저에 수장된 우키시마호에 대한 감춰진 진실을 김진홍 감독이 영화로 제작해 지난 9월 전국 393개 영화관에서 개봉했다. 솔직히 말하면 관객들 반응은 크지 않았다. 상업영화가 아닌 역사 다큐 형식의 영화라 흥행이 저조했다.

국민들의 한일관계 역사인식 격차가 컸음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미국의 ‘국경 없는 영화제’(Borderless Film Festival)가 아시아 유일의 사회적 이슈가 된 영화로 ‘우키시마호’를 선정했기 때문이다. 내년 2월에 최종적인 종합평가를 거치고 나면, 3월초에 미국 전역에서 다시 개봉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사망자는 얼마나 되나.

▲ 약 8,000~10,000명이 수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당시 일본은 1920년대에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했음에도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해 일본 오미나토 해군 경비부 관할 군사기지인 시모키타반도 일대와 미사와비행장 등지로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켰다.

공사에 참여한 토건업체만 해도 11개 업체에 달했다.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저지른 관동군 731부대의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인간생체실험과 황금백합작전(金のゆり)에서 학살당한 아시아인도 수없이 많다.

 

- ‘강제노역장’으로 악명을 떨친 시모키타반도는 어떤 곳인가.

▲ 일본 북쪽 아오모리현에 있는 시모키타반도는 일본의 4대 군항인 오미나토해군경비부가 주둔해 있는 주요 군항지다. 이곳에 조선인 강제노역장이 있었다. 나중에 우키시마호가 여기서 출항했고 폭침사건의 진원지가 된 곳이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전함이 북태평양에서 동해로 들어오려면 홋카이도와 시모키타반도 사이의 츠가루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북방지역 해협 제해권과 제공권확보를 위해 하코다테 해군기지가 지역방위를 맡고 있었고, 시모키타 반도는 군수물자공급의 중요한 군사요충지다.

대본영(大本營)은 군사시설 공사장에 필요한 노동인력 조달을 위해 조선인 9천명 강제 투입 공문을 오미나토해군경비부에 하달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아베시로 비철광산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하던 조선인이 15,000~20,000여 명이 일본군 핍박과 학살, 고문치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 일본의 학살만행 역사를 말해 달라.

▲ 우리 국민의 유해가 무주고혼으로 구천을 떠도는 것은 비단 우키시마호 폭침에 의한 수장학살뿐만 아니다. 일제가 항복한 이후에도 학살만행은 많았다. 사할린 가미시스카 경찰서가 화염학살을 했고, 노다•미즈호 냉동학살을 저질렀다.

제주도 땅굴진지 공사장에 투입되었던 옥매광산 광부들도 귀향도중에 청산도 앞바다에서 수장 학살당했다. 남태평양과 사할린에는 더 많은 영혼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다. 특히 탄광과 채석장, 철도공사장, 지하군수공장, 비행장 등지에서 죽어간 한국인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한국정부에 말한다. 이제 시간 끌지 말고 하루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 국가가 나서지 않고 있던 와중에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제침략피해문제 즉, 대일청구권문제 해결을 위해 꾸준히 투쟁을 해왔다. 이 문제해결은 곧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키시마호 선체
우키시마호 선체 ⓒ위클리서울/ 제공: 전재진 대표
ⓒ위클리서울/ 제공: 전재진 대표
바다에 폭침된 우키시마호의 마스트만 떠 있는 모습 ⓒ위클리서울/ 제공: 전재진 대표

- 대본영이 조선인 조기송환계획을 급박하게 세운 이유는.

▲ 일본 대본영이 9월 중순부터 조선인 송환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시모키타반도에서 만큼은 그에 앞서 8월13일 조선인 긴급 소개명령을 내렸다. 1945년 7월26일 공포된 포츠담선언 제7항에 따르면 연합국은 일본영토에 대한 보장점령 즉, 분할점령을 하려 했다.

영국과 중국, 소련, 미국 4개국이 일본을 분할통치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처칠 수상이 미국 트루먼에게 ‘소련이 극동에서 교두보를 설치하려 한다.’는 언질을 주자, 미국은 분할통치를 전격 취소했다. 그 날이 8월13일이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사할린에서 홋카이도와 일본 본토로 진격해 내려왔다. 그때 일본 아오모리 현에는 강제징용과 강제노동, 고문치사, 학살로 고통받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그런 조선인이 일제 항복 후 귀국하려고 우키시마호를 타게 된다.

 

- 강제승선까지 했는데.

▲ 미사와 비행장을 포함한 시모키타반도 일대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이 오미나토항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멀리 이와테현 채석장과 홋카이도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 조선인들은 멀리 정박해 있는 우키시마호까지 거룻배로 오가며 승선하는데 3일이 걸렸다.

일본 군부는 검은 페인트를 칠해 배의 이름을 지웠고, 기관실 옆 창고에 자폭장치를 설치했다. 일본 해군승무원들이 소문을 듣고 승선을 거부했으나 군부가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는 협박에 250명이 승선했다.

군부의 협박은 조선인들에게도 심리적 영향을 주었고 일부는 강제승선을 해야 했다. 승선완료한 후에도 24시간을 해상에서 머물다가 8월22일 밤 10시에 오미나토항을 빠져나갔다. 무츠만을 나온 배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았고, 일본 본토 연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다.

 

- 좀 더 자세히 말해 달라.

▲ 조선인들이 항로이탈을 따지자 해군승무원들은 연료와 물을 실으려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간다고 거짓말했다. 하지만 마이즈루 부두로 접안을 하지 않았고, 시모사바가 해변 3백 미터 해상 전방에서 멈췄다. 기관실 기계도 껐다.

곧 구명보트가 내려지고 고위급 장교들이 빠져나가고, 나머지 승무원들도 마치 송사리 떼처럼 헤엄쳐 모선을 버리고 탈출했다. 잠시 후 엄청난 대폭발이 있었고 배 중간이 V자 형으로 앞뒤가 들렸다가 가라앉았다. 선실에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고, 배안에는 아비규환을 이뤘다.

이때 기관실 연료탱크가 터져 바다는 온통 중유로 덮였다. 죽은 사람이 바다를 메웠다. 해군은 구조도 하지 않았고, 인근을 오가던 배들도 현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수 천 명을 집어삼킨 마이즈루만의 짙은 어둠은 모든 것을 가렸다. <2회로 이어집니다.>

 

 

▲ 전 재 진 
   1957년 충남 태안군 출생 / 아호 홍화평(弘和平)
   국립의료원, 한국보훈병원, 순천향의대 병리학 연구실 조직-세포학 종사
   1992 안면도 핵 폐기물처분장 설치반대투쟁위원회 홍보부장 
   일본 동경 NGO환경회의 “아시아의 하늘에는 핵이 필요 없다” 반핵아시아포럼 주창
   NGO아시아포럼 한국위원회 위원 제1회 반핵아시아포럼(일본 요코하마 1993) 참석
   ‘일본의 플루토늄 대량장기비축계획, 자위대 해외파병, 핵발전소 수출계획, 군사대국화’ 저지   
   일제수탈문화재 반환촉구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주) 영화사 메이플러스 작가
   다큐 영화 ‘우키시마호’ 수석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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