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굴은 동물인가 식물인가
굴은 동물인가 식물인가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조개를 캐는 여인네의 모습이 그림 같다. 멀리서 보면 그냥 거기에 앉혀놓은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한참을 정신없이 쳐다보게 된다. 가까이 가서 보면 치열하다. 발끝에서 손끝 아니 머리끝까지 장화와 비옷과 모자와 고무장갑 그리고 각종 두건으로 중무장을 하고 쪼그려 앉아서 호미질을 하는데 영점 영영영일 초도 멈추지 않는 손길이 흡사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진 로봇 같다.

사람이 다가가도 거의 감지를 못한다. 다가오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를 바람소리로 인식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이고 고생이 많으시네요.”하고 한 마디 말을 건네면 그 소리 또한 바람소리로 치부해 버렸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고, 좀 더 가까이 바싹 다가서며 기침 소리도 내고 발뿌리로 흙도 한 번 걷어차고 하면 그제야 고개를 들고 “어매 누구다요?”한다.

놀라서 쳐다보는 그 눈이 샛별 같다. 코도 입도 안 보이고 눈만 보여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샛별 같은 눈이 나를 한 번 힐끗 보고, 관심 없다는 듯이 하던 일을 계속 하다가는 이상하다는 듯이 또 한 번 힐끗 보면서 “아따 이 추운 날 믓하러 댕기신다요?”한다,

“꿀 주으러 다니네요.”

“꿀? 쩌그 꿀밭에 꿀 많은디 뭘 줏으러 다닌다요?”

“꿀밭에 것은 맛이 없어서요.”

“아따 그것이 뭔 소리다요?”

그녀는 눈을 오꿈하게 뜨고 나를 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오랜만에 이야기 친구를 얻었다. 십 분? 이십 분? 시간이야 아무런들 어떠랴. 생면부지의 여인네와 허허벌판 갯벌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 중요한 시간을 위해서 나는 그녀의 조개 캐는 작업을 조금은 도와야 한다. 내가 만일 일손도 보태지 않으면서 말붙이기만 계속 한다면 그녀는 “아따 저리 좀 가시오 야, 귀찮구만”하고 나를 쫓아버릴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지금 열심히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느낀다. 예전에는 몰랐던, 전혀 몰랐던, 상상도 못해봤던 새로운 맛을 알았고, 그 맛에 꽂혔으니 진화는 분명 진화다. 진화라는 표현이 과장으로 들린다면 급을 조금 낮춰서 취미 하나가 새로 생겼다 해도 괜찮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열 번도 넘게 그 맛을 목적으로 집을 나서곤 했으니 취미는 취미다. 아직은 아닐까? 적어도 일 년 정도는 더 그 맛을 음미한 뒤에서야 비로소 취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일까?

 

완전 자연산 굴밭
완전 자연산 굴밭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홀로 떠도는 굴
홀로 떠도는 굴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어쨌든 나는 그 맛을, 그 향취를, 그 매력을 알아버렸다. 끌림이라고 할까. 아니면 유혹이라고? 누가 내게 그 재미를 가르쳐준 것은 당연히 아니다. 주변에서 그 맛을 안다고 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것은 순전히 나의 발견인 셈이다.

전후좌우 사방이 확 트인 갯벌을 때로는 터벅터벅, 때로는 질척질척 정처없이 걷다 보면 구르는 돌멩이 같은 것들이 가끔 보인다. 생긴 것도 투박하게 꼭 돌멩이 같은 그것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주워서 등에 맨 배낭 속 비닐봉지에 담는다.

그리고 또 걷는다. 전에는 아무런 목적도 생각도 없이, 그야말로 정처없이 갯벌을 헤매 다니곤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뭐 어쩐다는 속담처럼, 무리를 떨어져 나온 굴이 뿜어내는 향기를, 그 유혹을, 그 끌어당김을 거부하지 못하고 기꺼이 그냥 빠져들어 가버리는 것이니. 이런 상황을 두고 아마 본말이 전도됐다고 하는 것일 게다.

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밀물과 썰물의 조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갯벌 바다를 공부하겠다고 나선 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돼가건만 나는 아직도 갯벌을 모른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다. 갯벌을 한 번도 밟아보지 않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몰라져서 아예 바보가 돼버렸다는 느낌이다. 처음 갯벌에 들어갔을 때는 오호, 이것이 이것로구나, 했었다. 한 삼 년만 열심히 드나들면 제대로 잘 알겠다는 건방도 생겼다.

확실히 그것은 건방이었다. 삼 년이 지나고 사 년, 오 년, 햇수가 더해질수록 이게 뭐지? 나는 점점 바보멍텅구리가 돼 간다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위안을 삼자면 갯벌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도 갯벌이 무엇인 줄을 모른다는 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갯벌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나한테 물어보라고 큰소리 땅땅 치던 사람이 다음 날 길을 잃고 밤새 헤매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와서 “아이고 죽을 뻔했네”하면서 겸손하게 고개를 설래설래 내젓기 일쑤이고, 이강망이란 이름의 그물을 쳐놓고 수십 년째 대를 이어가며 횟집을 운영하던 사람이 어느 하루 그물에 걸린 고기를 건져온다고 트랙터를 몰고 갔다가 영영 안 돌아와 버리기도 한다.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면서 나한테 오라고 끌어당기기 때문에 지구의 바닷물이 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는 것이야 뭐 불변의 상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달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돌고 또 돈다. 달이 일정한 속도와 인력을 유지한 채로 돈다면 바닷물도 일정한 시간에 딱딱 맞춰서 나가거나 들어와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해안 마을에는 누구네 집이나 기상청에서 제공하는 간조표가 적힌 달력을 걸어놓고 날마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일정을 잡는다. 오늘은 물 높이가 얼마이니 몇 시에 갯벌로 나가서 무엇을 하고 몇 시에 들어온다는 식의 계산은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초보적인 수준의 계산마저도 가끔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긋나 버린다.

어떤 날은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물이 나가기를 두 시간도 넘게 하품까지 해가며 기다리다가 풀 죽은 모습으로 돌아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두 시간 뒤에나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던 물이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오는 오랑캐처럼 막 달려오는 바람에 트랙터고 뭐고 다 포기하고 허둥지둥 도망쳐 나오기도 한다. 물이 빠르게 들어올 때의 모습은 흡사 수백 아니 수천만의 군사가 총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대며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만 같아서 공포가 턱에까지 차오르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만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은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아주 가끔 일어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사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문제이기에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단 하루도 긴장을 풀어놓을 수가 없다.

 

좋은 굴을 찾는 사람들
좋은 굴을 찾는 사람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조개 캐는 여인
조개 캐는 여인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엄청나게 많은 종류와 숫자의 생명을 품고 있으면서, 그 나름의 질서에 반하는 생명은 가차 없이 죽여 놓기도 하는 갯벌, 바다,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갯벌 바다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다면 그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얼핏 생각하면 금방 알 것도 같지만, 한 번 더 생각을 하다 보면 완전히 오리무중이어서 나는 애가 타고, 목이 말랐다.

갯벌 바다에서 벌어지는 돌연변이 현상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달과는 무관하다. 지구 내부에서 벌어진 어떤 일을 달의 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기에 달은 그저 쳐다만 봐야 하는 입장이라고나 할까. 지구에 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달도 별다른 이상이 없이 날마다 해 왔던 대로 돌면서 바닷물을 끌어당기지만, 지구에 비상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가령 지진이라든가 화산폭발 혹은 태풍 같은 것이 발생했을 때 달의 인력은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것일 테니, 갯벌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온전히 이해하자면 천문학과 지리학을 더듬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갯벌 바다를 제대로 깊이 알겠다는 건방을 버리고 그냥 갯벌과 친구나 삼기로 했다.

어쩔 것인가. 갯벌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고, 나는 갯벌을 며칠만 안 보면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한데 어쩔 것인가.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들처럼, 물이 좋아서 물을 찾는 사람들처럼,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야도 아니고 모래밭도 아닌 갯벌을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드나들던 어느 하루 그것을 보았다.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편하면 전에 안 보이던 뭔가 새로운 것이 보이기 마련이라는 어느 현자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전에도 그것이 눈에 안 보였던 것은 아니다. 보면서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쳐 왔었고, 가끔은 발로 걷어차기도 했었다. 뭐랄까. 그것은 당최 먹을 것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해마다 생굴을 껍질 채로 이십여 킬로씩 사다가 구워 먹기도 하고 쪄먹기도 했건만, 이상하게도 갯벌에서 하나씩 뒹구는 굴은 굴로 보이지 않고 그냥 그런 돌멩이 같은 것으로나 보이던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그날은 굴을 굴로 보고 한 개 주워 들고 집에 와서 연탄불에 구워 먹었던 것이니, 돌아보면 인연의 방식이 참 묘하기만 하다.

“야아 이건 완전 다른 맛이네?”

아무 생각 없이 굴을 구워 먹던 내 입에서 감탄사와 의문부호가 동시에 터졌다. 그 맛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하자면 달면서 고소하고, 풋풋한 향기마저 입안을 가득 채운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글쎄 이게 정확하나? 향긋하게 고소하고, 고소하게 향긋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형용모순 같지만, 그런 형용모순의 문장을 굳이 만들어내야만 할 정도로, 그 맛은 도대체가 인류의 언어로는 묘사가 안 된다는 느낌이어서 답답하고, 애가 탄다는 정도에서 우선 끝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 맛에 빠졌고, 사나흘 거리로 그 맛을 찾아서 갯벌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런데 갯벌을 떠도는 굴은 어쩌다가 무리를 떠나서 홀로 갯벌을 떠돌게 되었을까. 그게 궁금해서 그 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갯벌에는 딱히 어디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에 굴이 집단으로 서식한다. 매년 그 자리에 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굴이 하나도 없던 바지락 양식장 어딘가에 갑자기 굴이 생기고, 그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서 굴 밭이 되어버린다. 바지락 양식업자 입장에서 보자면 횡액도 그런 횡액이 없지만, 굴 채취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리가 바로 금 밭이다.

 

굴 채취 전문가들
굴 채취 전문가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희귀 조개를 찾는 여인
희귀 조개를 찾는 여인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굴 채취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집단으로 서식하는 굴을 하나씩 따서 망에 담는다. 망 하나에 대략 이십 킬로램씩이다. 그것을 갯벌 한쪽에 산처럼 쌓아놓고 시간이 차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차서 굴의 크기가 좀 더 커지고, 알도 실하게 영글면 굴 구이 집이나 상인들의 주문을 받고 판매한다. 이때 못나서 버렸거나, 혹은 실수로 떨어트린 굴이 바람에 쓸리고 물에 휘둘리면서 갯벌 여기저기를 정처없이 떠돌게 된다.

굴이라는 생물은 굳이 분류를 하자면 동물이다. 동물이지만 식물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뿌리를 일단 내렸다 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불의의 사고로 뿌리가 뽑히면 그대로 그냥 떠돌이가 되고 만다. 바람에 할퀴질을 당하고 물에 쓸려 떠도는 동안 굴은 죽거나 살거나 둘 중에 하나로 귀결이 되는데, 살아남은 녀석은 껍질이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해져 간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굴을 찾아 갯벌을 헤매던 어느 하루 문득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의 백화가 생각났다. 이런 뜬금없는 생각의 정체는 또 뭐냐. 허헛 참 내, 실소를 터뜨리고 나니 한 생각이 스쳐간다. 집도 절도 없는 백화, 그녀는 약하지만, 심지는 강하다. 갯벌을 떠도는 굴도 그런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도 고소하게 향기로운 형용모순의 맛이 느껴지는 것일까?

굴을 까먹다 보면 붉은 빛을 띤 작은 게가 나오기도 한다. 굴이 물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새끼 게가 그 안으로 들어갔으리라는 추론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새끼 게는 왜 그 안으로 들어갔을까. 그냥 단순한 호기심? 아니면 탐험가 정신?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이 생각난다. 한 소녀가 산에 갔다가 동굴 입구를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 컴컴한 굴속으로 들어갔다가 선사시대의 벽화를 발견했다. 새끼 게가 그 소녀와 같은 호기심 때문에 굴 속으로 들어간 것은 당연히 아닐 게다. 굴이 어쩌면 입을 쩍 벌리고 새끼 게를 유혹했는지도 모른다. 유혹의 이유는 아마 둘 중에 하나일 게다. 새끼 게를 식량으로 삼기 위해서거나, 굴 자신의 몸에 서식하는 미생물을 새끼 게가 먹어주기를 바랬거나.

작은 게가 자기 안으로 들어왔을 때 굴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자기 안에서 기생하는 각종 미생물을 작은 게가 먹어주니 고맙고 반가워서 어여삐 여겼을까. 아니면 아팠을까. 아파서 싫다고, 어서 빨리 나가 달라고 짜증을 냈지만 새끼 게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침입자 노릇이나 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짜증이 난 굴이 입을 닫아버렸고, 그래서 새끼 게는 사로잡힌 채로 굴과 함께 갯벌을 떠돌다가 내 손에 잡혀서 뜨거운 불에 익힘을 당하고 만 것일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온갖 생각들이 춤을 춘다. 물론 이것은 감상이다. 감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감상을 털어내고자 하지는 않는다. 감상이란 으레 달콤하기 마련이다. 달콤한 감상에 빠져 있노라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설핏 스친다. 무리를 떨어져 나와서 외롭게 구르는 돌처럼 살아가고 있는 굴을 잡아다가 구워서 맛나게 처먹고 있는 내가 참 못 됐다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후회까지는 안 간다. 이제 그만 먹자 하는 생각도 안 한다. 내일이나 모레쯤 되면 나는 또 갯벌을 돌아다니면서 집 나온 굴을 찾고 있을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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