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궤적에서 마주치는 순간
삶의 궤적에서 마주치는 순간
  • 류지연 기자
  • 승인 2019.12.13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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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류지연의 중국적응기 '소주만리'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내 나이 38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안정적인 한국생활을 뒤로 하고 타국에서 하루아침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준말) 신세가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아프리카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중국이라는 나라,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38살 아줌마의 중국 체험기, 지금부터 시작해본다.

 

동방지문(왼쪽), 바지처럼 가운데가 뚫려있어서 일명 '바지건물'이라고도 불린다.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중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절친한 대학 동기 H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었다. H는 전공을 살려 의류업계에서 10년 넘게 근무 중인데, 올 가을 중국으로 주재원 발령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중국에 아는 이라고는 동쪽 끄트머리에 1년에 반만 중국에 거주하는 베프 J뿐이었는데 동기 H가 소주 옆 동네인 상해로 오게 된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의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우습게도 이제는 부부싸움을 해도 찾아갈 피난처가 생긴다는 안도감이었다. 그 소식을 듣기 얼마 전에 남편과 크게 싸운 날이 있었다. 도무지 한 공간에 머무를 마음은 들지 않고 마음 같아서는 어디로 뛰쳐나가 잠적이라도 하고픈데 친구는커녕 아는 이도 없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이니 마음 둘 곳도, 몸 갈 곳도 없다는 사실이 참 아득하고 서러웠다.

그렇기에 친구의 소식을 들은 후 마치 내 발령이라도 되는 냥 발령이 언제 날지 하루가 멀다 하고 H에게 묻곤 했다. 야속하게도 사내 사정으로 발령은 미루고 미뤄져 아직까지도 그녀는 열심히 한국에서 근무 중이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에야 드디어! 내년 1월 상해로 건너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전에 마침 소주에서 중국 지사의 행사가 있어 며칠간 출장을 오게 된단다. 오랜 친구를 타국에서 보게 되다니 그 설렘이 어떠하랴.

화~목인 출장 일정에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어 목요일 하룻밤을 우리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친구에게 오랜만의 만남이니 주말까지 묵으라고 했건만,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놓은 엄마들이 으레 그렇듯이 오랜 짬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목요일 오후, 드디어 소주에서 친구 H를 만났다. 감개무량한 순간이다.

그녀와 나는 삶의 궤적에서 마주치는 순간들이 참 많다. 대학 시절 큰 길을 사이에 두고 같은 동네에 살았기에 졸업 이후로도 마주칠 기회가 많았고 이후 비슷한 시기에 인생의 한 부분을 노량진의 골목길에서 각자 다른 공부를 하며 보내기도 했다. 결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몇 달 간격으로 했기에 결혼 전에 가장 많은 경험담을 공유했으며, 아이마저 비슷한 시기에 낳아 동갑인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중국살이까지 비슷한 시기에 하게 된 것이다. H는 농담 삼아 우리 둘의 사주팔자가 같을 게 틀림없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자주 연락을 해서 그런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생각해보면 중국에 오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친구도 H다. 중국어라곤 18년 전 교양수업으로 한 학기 들은 게 전부여도 용감하게 (직장 동료의 도움을 받아) 혼자 택시를 타고 집 앞까지 온 H. 집으로 맞아들였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안은 허접한 중국의 아파트를 먼저 둘러보게 한 후, ‘메이투안’으로 우유차를 두 잔 주문한다. 타피오카와 단팥을 넣은 쿠키맛 우유차였는데 친구는 화요일부터 중국에 와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다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중국생활에서 첫 번째로 좋아하는 것을 꼽으라면 나 역시도 값싸고 맛있는 우유차일 만큼, 중국은 우유차 천국이다. 귀리, (치즈)크림, 푸딩, 아이스크림 등 올려먹는 토핑부터 타피오카 펄, 단팥, 코코넛 과육 등 넣어먹는 토핑까지 한 종의 우유차도 토핑 조합에 따라 다양한 맛으로 즐길 수 있다. 중국에 처음 와서 마음 붙일 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우유차를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유차와 함께 그간 지낸 이야기와 중국에 대한 인상들을 풀어놓는다. 그러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은 내가 중국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과는 참 달랐다. 친구는 십 년 전쯤 상해에 두 어 번 장기 출장을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상해는 패션쪽으로는 뉴욕과 함께 전 세계에서 1, 2위를 다툴 만큼 최첨단의 시장인지라, 그 당시 상해를 방문했을 때도 서울은 비교도 안 되게 발전됐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돌아다닌 곳들도 서울의 웬만한 점포들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크고 화려하게 꾸며진 상점들이었기에 중국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안 씻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낙후됐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소주에 오기 전 나의 유일한 중국 경험인 2007년의 북경 여행과는 너무 다른 인상이었다. 당시 북경에서 일하던 베프 J를 만나러 여름휴가를 왔던 나는,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일부러 길을 구불구불 돌아가거나 아니면 엉뚱한 곳에 내려주는 택시, 좁고 더러운 시장골목, 겉모양은 타워팰리스인데 내장재는 날림시공한 빌라 같은 중국의 아파트에 좋은 인상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왕푸징이니 하는 쇼핑거리에서 갤러리아처럼 고급스럽게 꾸며진 상점들을 가보긴 했지만, 한 벌에 농민공 반 달 월급 수준이라는 블라우스 가격표를 보며 느낀 거라곤 빈부격차의 씁쓸함뿐이었다. 단지 땅덩이의 거대함만은 새롭게 와닿았는데, 보통의 아파트 앞 도로도 거의 10차선은 될 법하게 널찍하게 뻗어있는 게 역시 대륙은 규모가 다르구나 싶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친구는 중국살이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은 없었다. 다행이다. 단지 상해는 집값이 엄청 비싸서 어마어마한 월세를 주고도 그다지 크지 않은 집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딜 가나 집값이 제일 문제인가 보다.

한창 수다를 떨다가 아이의 하교 시간이 됐다. 아이와 함께 셋이 시간을 보내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귀가해준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북경오리를 먹기로 해서 이전에 가본 중국음식점으로 향했다. 웃긴 건 사천 음식점(사천은 매운 요리로 유명한 중국 남서쪽 지방이다)인데, 전혀 맵지 않고 이름은 다르지만 북경오리와 똑같은 맛의 오리고기를 판다는 거다.

배불리 식사를 한 후 친구와 함께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중국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발마사지 아닌가. 아늑한 방안에서 친구와 함께 마사지를 받으며 마사지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가 있어서 용기가 났던 건지, 아니면 이번 마사지사들이 좀 더 친절했던 건지, 이전에는 두세 명이 같이 와도 딱히 마사지사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그럭저럭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소주화(소주방언)’라는 게 따로 있다고 들어서 마사지사들에게 ‘소주화’를 알아들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중국인들끼리도 지방마다 말이 달라서 같은 지방 말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다. 한 마사지사는 이전에 4년 동안 상해에서 근무했지만 ‘상해화(상해방언)’는 전혀 못 알아듣는단다. 다만 학교에서는 ‘보통화’를 가르치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끼리 만나도 보통화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지역 방언이 우리나라의 사투리쯤 될 텐데, 아무리 그래도 전혀 못 알아듣는다는 게 이해는 좀 안되지만 워낙 땅덩이가 넓으니 뭍사람들이 제주도 방언을 못 알아듣는 걸로 생각하면 되려나 싶기도 하다.

마사지를 끝내고 한참 마사지실에서 수다를 떨다가 자정이 다 된 시각 귀가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를 보낸 후 학교수업을 하루 쉬고 친구와 함께 관광지인 평강로(平江路, píngjiāng lù)로 향했다.

평강로는 개천을 따라 옛날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옛날거리이다. 개천변의 건물들은 대부분 상점으로 변해서 공예품이나 먹거리, 전통의상(치파오) 등을 팔고 있지만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밀조밀한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네 시골처럼 집 앞 길가에 빨랫줄을 쳐서 빨래를 걸어둔 광경도 보이고, 여름이면 런닝을 걷어 배를 드러내거나 아예 웃통을 벗어제끼고 문가에 나와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들의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좁다란 길목에 탁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를 꺼내놓고 카드놀이를 하는 할아버지들도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친구의 운이 좋았던지 마침 미세먼지가 걷혀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일임에도 평장로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보였다.

 

평강로 초입의 환영 표지판, 액자 구성이 매우 운치 있다.
평강로 초입의 환영 표지판, 액자 구성이 매우 운치 있다.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느긋하게 거리를 거닐며 여기저기 가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딸내미와 친구의 아들내미에게 선물할 ‘만화경’ 기념품도 샀다. 간식거리를 파는 집에서는 북경 특산품으로만 알고 있었던 누가(흰 빛깔의 무른 사탕. 설탕, 물엿, 녹말 엿 따위를 끓여 흔히 땅콩, 밤, 살구 따위를 섞어서 굳혀 만든다- 표준국어대사전 참조)를 발견했다. 이리 가까운 데 있는 줄 알았으면 그때 한보따리 사오지 않아도 됐을 것을… 괜스레 배신감이 들었다.

한가로운 오전을 보내고 근처의 신장 음식점으로 가 양꼬치와 사천짜장면풍의 면요리 등으로 두 번째 만찬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우유차를 한 잔 더 선사한 후 집으로 향했다. 저녁 비행기를 타는 친구를 배웅해야 할 시간이다.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것 같아서 아쉽지만, 앞으로는 자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된다. 앞으로는 ‘상해에 자주 놀러가는 여자’가 될 계획이다.

<류지연 님은 현재 중국 소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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