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신간]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 이주리 기자
  • 승인 2019.12.18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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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지음/ 문학동네
ⓒ위클리서울/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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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넉 달간 매일 아침, 시 한 편을 고른 이의 뒷모습으로 시작해본다. 그 넉 달은 북한의 대규모 핵실험과 미국의 트럼프식 리더십이 충돌하던 때였다. 주한 미군이 사드 장비를 배치했고, 중국이 한국을 여행 금지 국가로 지정했던 때였으며,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한국을 도발하고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때였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파면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던 때라고. 그런 날들을 살며 매일 아침 신문에 실릴 시를 고른다면 당신은 어떤 시들에 손을 뻗을 것인가. 이 책은 속수무책 무릎이 꺾이던 이 시기(2017년 1월~4월), 중견 시인 김사인이 매일 고르고 살아낸 시 82편을 담았다.

『밤에 쓰는 편지』(1987), 『가만히 좋아하는』(2006), 『어린 당나귀 곁에서』(2015)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하며 쓰기의 형식으로 “‘시하는’ 노릇”을 이어왔다면, 이 책은 읽기의 형식으로 ‘시하고자’ 했던 시인의 노력일 터이다. ‘시대를 아파하고 분노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不傷時憤俗非詩也)’ 다산 정약용의 언명을 손에 쥔 채, 시인은 나라 안팎의 격랑을 직시하며 한 편의 시에 나날의 소감을 붙였다.

한기가 가시지 않은 2월의 어느 아침, 저자는 이성부 시인의 「봄」을 골랐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라고 시작하는 시. 이 시를 고른 소회에 저자는 “긴급조치의 시대이던 1974년의 작품. 사십 년도 더 전의 시를 마치 오늘의 것인 양 읽게 되는 심정이 기구하다”라고 덧붙였다. 으스스한 봄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낯설거나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더더욱 시대의 아픔을 통감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 삼십대에 쓴 글 「염재기」의 한 대목을 옮기며 저자가 덧붙이 글이다. 술 취해 자다 깨 자기 자신을 찾는 ‘송욱’의 ‘분열적 유체이탈’이 남의 일인 것만은 아니라 서늘히 깨달은 터. “이백여 년 전에 제기된 이 ‘참된 나’ 화두가 아파, 일세의 문장다운 함축과 여운을 기릴 겨를이 없”어 슬프다 적으며 저자는 한 시기를 또 묵묵히 기록해둔다.

이렇듯 저자는 연구자이자 시인으로서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 가운데 현재의 우리가 거울처럼 들여다봄직한 시들이 곳곳에서 출몰했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깊이 생각해왔을 터이고, 그 감식안과 고찰이 이 책의 기본 뼈대가 되었다.

상기한 「염재기」와 같이 김사인 시인이 고른 ‘시’의 범주가 폭넓다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이 될 것이다. 저자는 그날그날 상황에 가장 의미 있을 시를 고르되 한시와 외국 시까지 포함했으며, “시만이 시가 아니라 모든 절실하고 애쓴 언어들은 시에 준한다는 생각”을 더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1919년 청년들이 목청껏 부른 노래 <광복가>에서부터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민국헌법 전문」, 「흥부가 돈타령」, 「소요유」, 신채호의 한시와 릴케, 프랑시스 잠, 자크 프레베르의 시, 그리고 에릭 클랩튼의 <천국의 눈물>까지 한 권에 아우를 수 있었던 이유가 그에 있다. “마음에 사무치는 바가 말과 글을 입으면 그것이 바로 시다. ‘시’를 시늉한 겉모양이 시가 아니라, 안의 사무침이 시인 것이다”라는 저자의 신념과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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