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위클리서울=이재인] 역사 정말 무섭다. 그런데도 권력이나 금력을 소지한 사람들은 그것을 잊고 산다. 그래서 멀리 보는 자를 지혜자로 부른다. 혹은 그런 사람을 종교적으로 예언자라 일컫는다.
최근에 필자는 ‘한국작가회의 40년사’를 펼쳐보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가 거기에 기록된 내 이름을 보곤 깊은 충격을 받았다. “어라 누가 내 행적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필자는 70년대 박정희 정권하에서 유신 찬반 투표에 반대했다. 이른바 정부에서 말하는 반정부인사였다. 교육공무원 신분이라고 자실련(자유실천문학작가회의) 총무를 맡은 이문구형이 나를 넣어놓고 발표하지 않았다. 음성적으로 지원금과 기부금도 정성껏 냈다.
예나 지금이나 재야 운동권 단체는 비밀에 신경을 쓴다. 보안에 구멍이 뚫리면 조직은 와해되기 마련이다. 이런 내가 행한 일들이 작가회의 40년사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게 비밀은 음지에서 싹튼 콩나물처럼 고갤 내미는 습성이 있다. 이런 걸 우리는 진실이라 한다.

필자는 작가 이문구형과 문인협회에서 만났다. 수인사 끝에 그는 내가 쓰는 진한 충청도 사투리에 고향도 알아차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내들의 세계란 향연 학연 이런 게 뿌리 깊게 작용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문구형이 추진하던 자실련 회원 명단에 내 이름 석 자가 올라 이른바 103인 선언에 끼어들었다. 이런 사단으로 내가 근무하던 부천 소재 S 여고에서 나는 조사와 수사를 받았지만 발설한 바가 없다.
조용히 사표를 내고 저 멀리 충북에 가서 은밀히 임용고시를 치렀다. 운 좋게 필자는 합격하여 과거를 일절 말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와신상담 끝에 문교부로 영전, 또 대학교수로 조용히 지냈다. 

그런데 최근 누군가가 전해준 아주 두꺼운 양장본 ‘작가회의 40년사’를 펼치자 그간 숨겨왔던 과거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얼굴이 뜨거웠다. 숨긴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이를 옮겨적어 본다. 김지하 시인이 석방되어 양심수로 영웅시되던 그 기록이다.

ㅡ 김지하는 75년 2월 15일 밤 9시 30분에 영등포구치소에서 환영인파에 둘러싸여 석방되었다. 그 자리에 고은 신경림 백낙청 천승세 조태일 한남철 양성우 염무웅 이문구 이재인 박용수 등 자실련 문인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ㅡ

이 기사를 보니 하늘이 노랬다. 그날 나는 모자를 눌러 썼었다. 캐나다에서 박상륭이 이문구에게 보내준 청바지 천으로 만든 모자를 내게 임시 빌려 쓰곤 일종의 위장용으로 행동하였던 것인데 누가 어디에서 보았는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다만 내 기억에, 동아일보에 근무하는 시인 김광협 선생이 "조심하시오" 하곤 지나갔다. 그도 나와 같이 103인 중에 있어 나를 보호하는 처지였다

지금처럼 CCTV가 설치되었던 것도 아니다. 이러니 세상에 비밀이 없다고 하겠다. 나는 40년 동안 어디에서도 자실련에 들어갔거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였다고 밝힌 바가 없다.

지금도 나는 나의 작업실에 앉아서 이 글을 쓴다. 이것도 책과 필기구만이 글을 쓰고 있음을 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창가에 나무들 그리고 숲 그런 생물들에게도 그것들 나름의 눈과 귀가 존재한다는 프랑스 소설가의 "어느 나무의 일기"가 떠오른다.
디디에 반 코뵐라는 나무도 인간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눈과 귀와 그 감촉을 말해서 뭐라 하겠나…….

지금 우리 곁에서 은밀하게 일을 꾸미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번 이글에 시선을 주게 되면 후환이 없으렷다. 40년 전 내 거취도 민낯으로 드러남에 최근 일을 말해서 뭣하리……. 사실은 지금도 우리 곁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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