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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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사람이 일평생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빠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성이든 동성이든 우정이든 간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일이 일생에 몇 번 정도 나에게 일어나겠냐는 말이다. 그건 교통사고가 일어날 확률이나 죽을 뻔한 일을 겪게 되는 것만큼이나 드물게 찾아오는 건 분명하다. 그만큼 사람이 사람을 내 인생에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을 많이 살아본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게 된다. 왜냐면 경험이 삶의 거름망 구실을 해서 갈수록 촘촘하게 그물을 짜고 시력은 떨어져도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더욱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나에게 베푸는 것이 순수한 호의인지 관심인지 애정인지를 우리는 판단하려 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사고 같은 만남을 겪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생기는 어떤 미묘한 감정은 말로도 글로도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다. 마음을 줘야 되겠다고 작정을 해서 주는 게 아니고 만나야 되겠다고 작정을 한다고 해서 만나지는 게 아니다.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짬뽕을 먹게 되는 변덕처럼 우리 인간의 감정은 그토록 대책 불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혈액형이 B형이다. 보통 나와 같은 혈액형이 사람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고들 한다. 인정한다. 나이 스무 살이 넘어 처음 남자를 사귀었고 처음 사귄 남자와 결혼이란 것을 했다. 그 전에 누군가를 만나서 제대로 연애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이러저러한 의미에서 나의 첫 남자였다. 남들 다 해본 연애이야기를 식상하게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고 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계속 끌고 갈 다른 방법이 없기에 조금 더 늘어놔 보겠다.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대학 1학년 때이다. 진짜 딱 한 번 ‘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군대를 가버렸다. 군대 가기 전에 말이라도 몇 마디 나눠보고 눈이라도 맞았더라면 집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복무하고 있는 군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지도 모른다. 앞뒤좌우, 되고 안 되고, 뭐 이런 상황판단 따위를 재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좋으면 무조건 만나야 되고 봐야 되는 B형이었으니까. 하지만 운명은 스치듯 떠나버렸다. 너무나 낭만적이고 뜨겁고 미숙하고 서투르고 달뜬 그런 국방연애를 그때 해봤더라면 지금 내가 글을 쓸 때 더없이 좋은 재료로 두고두고 써먹을 텐데 그 기회를 아쉽게도 놓쳐버린 셈이다.

뭐 암튼. 그 사람은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한 다음에야 내 앞에 나타나서 본격적으로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학보사 선배로 만나 첫 대화를 텄고 그 다음은 내 글을 가지고 주구장창 생트집을 잡았다. 이게 글이냐. 생각이라는 걸 하고 기사를 쓰냐. 소설을 쓰자는 거냐. 처음부터 다시 써 오라며 아주 생xx을 다했다. 처음엔 억울해서 눈물이 났고 다음엔 오기가 생겼고 그러다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선배님.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한 말씀만 (구체적으로) 해주소서. 제가 (너를 죽이고 싶지만) 글을 다 뜯어고쳐 다시 써오겠나이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만 유독 트집을 잡는 그 선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왜냐면 그때 나에게 그토록 유별나게 상처를 주는 인간… 아니 남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선배가 인사동에 전시회 취재를 가야하니 몇 시까지 어디로 나오라고 일방적 통보를 해왔다. 물론 나는 나갔다. 어떻게든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잘 보여서 학보사 생활을 잘해보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고 살고 싶었다. 이철수 판화전이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난다. 전시회를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에 없다. 잔뜩 얼어 있었고 잔뜩 얼어 있었다. 취재 비슷한 것을 마친 다음 인사동 거리를 조금 걸었다. 그런 다음 ‘어허, 자네 왔는가’ 뭐 이런 비슷한 주점으로 날 데려갔다. 나는 복날을 앞둔 똥개마냥 주눅 들어 눈치를 살폈다. 당장에라도 목에다 새끼줄을 걸고 가마솥으로 질질 나를 끌고 갈 것 같던 그 선배는 막걸리 몇 잔을 비우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꾸 갈구니까 아니꼽냐?”

아니꼽다기 보다는 죽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때만 해도 순진해서 모든 것이 내 탓 같았다. 글을 못 쓰니까 이런 꼴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는 듣고 싶었다. 왜 자꾸 나한테만 xx을 하는지. 막걸리 몇 잔을 더 비우고 난 선배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다음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을 것처럼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여름 방학하면 나하고 영화 보러 갈래?”

처음에 나는 그 말이 무슨 영화 제목인 줄 알았다. 내가 학보사 문화면을 맡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말 치고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대사였다. 나는 한참을 갸웃거리다가 선배 한 번 쳐다보고 막걸리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두부 한 조각 집어먹고 김치 쪼가리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이 상황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본 다음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괴롭히고 일단 갈구고 보는 왜곡된 그 방법이 나에게 먹혔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나에게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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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쓴 일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은 설렘이고 행복이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시기가 있다. 손만 잡아도 백만 볼트 전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고 그 사람의 땀 냄새 발 냄새조차 향기롭게 느껴지는 그런 시기. 미친 호르몬이자 가장 낭만적인 호르몬이 분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람들이 이렇듯 반 미쳐야 사랑이 시작된다는 거다. 하지만 이 몹쓸 호르몬은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복숭아 통조림처럼 (설탕 맛 밖에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색깔과 형태를 유지한 채 남들보다 조금 더 길게 끌고 가기도 한다. 처음 그 열정은 아니라 하더라도 또 다른 사랑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엄청나게 존경한다.

학보사 선배이자 나를 죽도록 갈구다가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영화를 같이 본 그 남자하고 나는 결혼을 했다. 우여곡절은 소설로 써도 모자라나 별로 아름답지도 재미있지도 않을 듯해서 쓰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우리는 살면서 죽고 못 살만큼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하든 사랑이 식어 헤어지든 우정을 나누든 뒤통수를 맞든 인간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의 생로병사를 겪고 산다. 그리고 사랑하고 좋아했던 것 만큼에 비례해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발작을 일으키며 감정을 토해낸다. 배신을 당했느니 뒤통수를 맞았느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이럴 수 있냐느니 너만은 이럴 줄 몰랐다느니 가슴이 찢어진다느니 등등. 세상에서 제일 아픈 주먹은 내가 진심을 다해 좋아한 사람이 나에게 날린 펀치일 테니까.

영원하리라 믿었던 행복한 순간들이 사소한 오해였든 식어버린 애정이었든 순수하지 못한 우정이었든 한 순간에 오물통에 처박히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엄청난 고통을 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한 달 정도 긴 잠을 잘 수 있는 약이 있다거나 기억의 한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 버리는 수술이 있다면 그것마저 후유증을 감수하고라도 받고 싶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 힘든 감정의 기승전결을 고스란히 감당해내야 한다.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행복한 감정이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내야 하는 감정의 고통으로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아온다.

얼마 전 내 주변에 누군가가 그런 일을 겪었다. 옆에서 보기에 참 마음이 아팠다. 내가 젊었거나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조언도 하고 충고도 하고 같이 열도 받고 했겠지만 그런 건 사실 아무 소용없다. 결국은 모든 감정이 그 사람을 통과해서 떠나갈 때까지 온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다.

미움을 버리지 말고 사랑을 버려야 끝이 난다는 것도 모른 채.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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