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인연은 있다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인연은 있다
  • 김양미 기자
  • 승인 2020.01.16 0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경기전 돌담길.
경기전 돌담길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이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주인집 아줌마가 집을 나갔다. 어떤 주인집이냐면 지금 내가 며칠 묶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말하는 거다. 월, 화, 수, 목 그러니까 오늘까지 4일째 이곳에서 방을 빌려 쓰고 있다. 왜 방을 빌려 쓰냐면 아… 이게 말이 자꾸 길어지고 설명이 필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

비가 온다. 나는 수원역으로 향하는 13번 버스를 타고 있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무조건 제일 먼저 출발하는 곳의 표를 끊기로 했다. 전광판을 본다. 전주. 무궁화호 3시 56분. 우연을 가장한 인연을 믿고 그 인연으로 맺어진 운명을 믿는 편이다(솔직히 말하면 기차표 끊어놓고 멍하니 기다리기 싫어서 그냥 제일 빠른 표로 끊었다). 10분 뒤 출발. 커피 한잔을 사야한다. 여행이라는 설렘으로 소금 커피라는 걸 처음 사봤다. 한 모금 마셔봤는데 전혀 짜지 않다. 이거 사기잖아. 중얼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밖에 비도 오고 따뜻한 커피도 있고 읽을 책도 있으니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다. 딱 좋다. 그런데 내 앞쪽으로 젊은 커플이 와서 앉는다. 여자가 말한다. 기차에서 냄새가 나. 남자가 익숙하게 코트에서 향수인지 냄새 제거제인지를 꺼내 공기 중에 슉슉 뿌린다. 유별나긴.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상한 냄새가 섞여드는 커피를 마신다.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다. 망설여지더라도 그냥 떠나보자. 생각따위 잠시 접어두고. 그래도 될 만큼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다. 망설여지더라도 그냥 떠나보자. 생각따위 잠시 접어두고. 그래도 될 만큼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젊은 남자가 앉았다. 우울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고 있다. 잘생겼다. 내 뒤로는 외국인 노동자 둘이 앉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둘 다 눈을 감고 잔다. 피곤한 타국살이에 잠이 고팠나보다. 오랜만에 타보는 무궁화호를 둘러본다. 요즘 기차치고는 촌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평택역. 천안역을 차례로 훑으며 기차는 빗속으로 흐른다. 잠시 다른 역에 멈춰 설 때마다 옆자리에 놓여있는 노트북과 가방을 내 무릎으로 옮겨 놓는다. 누군가 불쑥 나타날 거 같아서다. 하지만 조치원역부터는 그냥 치우지 않고 놔둔다. 회색 배경의 아파트가 늘어선 신탄진역을 지나고 보니 혼자 앉아있던 잘생긴 남자가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외국인 아줌마로 바뀌어 있다. 그 여자는 빠르고 톤의 변화가 거의 없는 낮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다. 듣고 있으려니 누군가 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것처럼 잠이 몰려온다. 깜박 졸았던 것도 같다.

오후 5시. 비가 와서 밖이 어둑해진 탓에 기차 유리창에 비친 동그란 형광등 불빛을 보고 벌써 달이 떴구나 생각했다. 6시 45분에 드디어 전주에 도착. 역에 내려 비 때문에 택시를 탔다. 한옥마을로 가주세요. 아저씨는 나를 흘끔 보더니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제가 한국 사람처럼 안보이나요? 요즘은 워낙 많으니까. 중국, 일본, 필리ㅍ… 아무튼 다 비슷해 보여. 나는 어디 쪽으로 보이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전동성당 앞에 나를 내려주기 전까지 아저씨가 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어야 했는데 조금 괴로웠다. 일단 말에 쉼표나 마침표가 전혀 없었고 트럼프를 욕하다가 갑자기 집값에 대한 이야기로 건너뛰고 요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김구선생님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열심히 듣는 척하며 핸드폰으로 딴 짓을 했다. 비오는 전동성당 앞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서 있었다. 왜냐면 어떤 계획도 없이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지금부터 어디로 가서 이 한 몸을 뉘여야 할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조금 걷다가 예쁜 담벼락이 나오길래 무작정 따라 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그 유명한 ‘경기전’이었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체 그냥 돌담을 따라 걸었다.

 

인연의 발길이 닿아 머물렀던 그곳
인연의 발길이 닿아 머물렀던 그곳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인연의 발길이 닿아 머물렀던 그곳
인연의 발길이 닿아 머물렀던 그곳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우연을 가장한 인연과 운명 같은 걸 믿는 사람으로서 무조건 처음 눈에 띄는 민박이든 게스트 하우스든 찜질방이든 아무데나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20여분을 걷다보니 눈앞에 쟁반만한 표지판 하나가 보였다. ‘전통한옥 숙박’이라고 적혀있었다. 안내판을 따라 골목을 돌아 들어가니 자그마한 한옥 한 채가 나왔다. 어머,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과 너무 닮았네. 이러며 벨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하마터면 ‘저에요’라고 할 뻔 했다. 한옥처럼 조그맣고 예쁜 아줌마가 슬리퍼를 끌고나왔다. 어머, 비오는 날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왔을까. 저도 몰라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찾아왔어요. 어머, 반가워라. 이리로 들어와요. 이 방 금방 따듯해지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방에는 두툼한 솜이불과 요가 깔려있다. 그리고 우리 엄마처럼 예쁜 주인아줌마가 나를 딸같이 반겨주니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가방과 노트북을 내려놓고 천천히 둘러본다. 어린 시절에 내가 살던 방과 닮았다. 비닐장판이 아니라 니스 칠을 여러 번 덧바른 노란 종이장판이다. 이런 방에서 잠을 자 본 게 얼마만인지. 두툼한 솜이불 밑으로 발을 밀어 넣자 방바닥의 뜨끈한 온기가 종아리와 엉덩이에서부터 퍼져나가 온몸이 노곤해진다. 나는 그렇게 그곳에서 첫날밤을 꿈도 없이 푹 잤다.

다음 날 아침. 고양이 발걸음으로 내 방문 앞을 스치듯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아줌마다. 여자 혼자 와서 점심때가 다 되도록 기척이 없으니 걱정이 됐나보다. 살짝 문을 열고 나가니 마당에서 박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아줌마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대문 앞에 걸린 주머니에서 얼른 연세우유 한통을 꺼내 내 손에 쥐어준다. 시간이 이렇게나 됐는데 배고프지 않아요? 잘 자고 났더니 배가 고프네요. 맛있는 집 있으면 알려 주세요. 여기 오면 무조건 이걸 먹어야 돼요. 우리 집에서 왔다고 말하면 2천원 깎아주니까 꼭 말하고. 아줌마가 음식점 앞까지 데려다 준 ‘왱이 콩나물 국밥집’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핸드폰으로 ‘왱이’ 뜻을 찾아봤다. 왕이라는 뜻이었다. 콩나물 국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왕 맞네. 진짜 콩나물 대가리 하나 남기지 않고 다 긁어먹었다. 아줌마가 시킨 대로 민박집 이름을 슬쩍 대자 고개를 끄덕이며 2천원을 빼줬다. 그 돈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기로 했다.

 

오래된 자개장 경대. 방안의 나무기둥. 솜이불 아래 뜨끈한 아랫목. 이런 곳에서 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잠시 잊고 살았다.
오래된 자개장 경대. 방안의 나무기둥. 솜이불 아래 뜨끈한 아랫목. 이런 곳에서 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잠시 잊고 살았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깎아 매일 방문 앞에 갖다놔주시던 과일.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깎아 매일 방문 앞에 갖다놔주시던 과일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삼양다방
삼양다방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곳이 있었으니 왠지 포스가 남달랐다. 삼양다방. 앞에 써놓은 글을 읽어보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생긴 다방이라고 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 들어가니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 있던 초원 다방 생각이 났다. 엄마 말로는 그 다방 주인이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을 감명 깊게 보았기에 다방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했다. 다방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성냥으로 탑이라도 쌓아 올려볼까 하다가 여자 혼자 처량하게 놀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커피만 사가지고 얼른 나왔다. 다음으로 내가 찾아 간 곳은 헌 책방이었다. 나는 갑자기 이 동네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헌 책방이 두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한 곳은 엄청나게 많은 책을 쌓아놓고도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은 꼴랑 하나 밖에 내놓지 않아 저기 안쪽에 있는 책을 고르려면 망원경과 3미터짜리 작대기라도 들고 와야 될 판이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매우 마음에 들었다. 거기서 3시간 정도 책을 뒤지며 시간을 보낸 다음 읽고 싶었던 책 4권을 사서 내가 머무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랫목에 몸을 파묻고 엎드려 꼼짝 않고 책을 보고 노트북을 두드리며 놀았다. 내가 하는 꼴을 하루 이틀 살펴보던 아줌마가 방 앞에다 먹을 것을 쟁반에 담아 갖다 두기 시작했다. 이거 좀 먹고 해요. 나가기 싫으면 내가 김밥이라도 사다줄까. 전기 주전자랑 커피 갖다놨어. 이건 대추 끓인 물이고 저건 생강과자 만든 거야. 홍시랑 과일도 좀 먹어봐요. 방문을 열 때 마다 내 방 앞에는 정성스럽게 쟁반에 담겨진 먹을거리와 과일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꼼짝 않고 들어앉아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있다가는 돼지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에 오늘은 말씀을 드리려고 했다. 이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데 오늘 아침 방문을 열자 이상하게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낯선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오시더니 나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셨다.

 

떡갈비 정식과 함께 먹은 전주비빔밥. 밥풀 한톨 남김없이 너무나 맛있고 감사하게 잘 먹었다.
떡갈비 정식과 함께 먹은 전주비빔밥. 밥풀 한톨 남김없이 너무나 맛있고 감사하게 잘 먹었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왱이 콩나물 국밥집
왱이 콩나물 국밥집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나 여기 강원도 여행 왔어요. 여동생이 미국에서 왔는데 갑자기 바다가 너무 보고 싶다는 거야. 늦게까지 자는 거 같아 말도 못하고 왔네. 불편한 건 없어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내 집처럼 푹 쉬어요. 손님 아무도 안 받았으니까 조용할 거야. 거기 계신 아주머니가 갖다놓은 과일 먹고 집 앞에 어제 알려준 음식점 있죠.

전화 해놨으니까 거기 가서 떡갈비 정식 꼭 먹어요. 돈은 내가 벌써 줘놨으니까 그냥 맛있게만 먹어. 아무 걱정 말고 편히 쉬어요.

자. 이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줌마는 그렇게 집을 나갔다. 나에게 이토록 예쁜 한옥 한 채를 통으로 맡겨놓고. 도대체 날 뭐로 보로 날 어떻게 믿고 집을 나가셨을까. 한편 재밌고 또 한편 ‘이게 뭔 일이래 진짜’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상황 그대로를 그냥 즐기기로 했다. 인연이 닿아 이곳까지 왔고 또 인연이 닿아 엄마 같은 아줌마를 만났으니 나는 잠시 여기 머물며 딸 같은 손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생각이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꼭 먹으라고 당부한 그것.

“떡갈비 정식은 제가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