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0.01.17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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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탐방기] 정동진독립영화제 1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제 21회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렸다. 작년 8월 2일부터 4일까지 바다 옆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여름의 축제였다. 더위마저 낭만이 된 그 시간이 지금의 추위를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전주에 이은 두 번째 영화제 탐방기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1999년부터 시작되어 작년에 일곱 번째를 맞이했다. 해마다 8월이면 자유로움과 실험성, 재기발랄함이 가득한 독립영화를 정동진의 밤하늘에서 상영한다. 독립영화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능동적인 형태로 대안문화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정동진독립영화제가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많은 영화제들이 해당 지역과는 상관없이 국제성을 지닌 세계인의 축제로 확장되곤 한다. 첫 번째 영화제 탐방기를 장식한 전주국제영화제나 작년에 새로 출범한 강릉국제영화제, 가장 유명한 부산국제영화제가 대표적인 예다. 평소에 보기 힘든 국가의 영화나 실험적인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 영화제만이 갖는 주제성이나 특성은 강하게 남지 않는 편이다.

반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이름부터 그 특성이 뚜렷한 영화제도 있다. 정동진독립영화제 역시 지역적 특색과 독립영화라는 커다란 주제가 개성을 발하는 독특한 케이스다. 보통은 기존에 있는 영화관들에서 산발적으로 영화를 상영하거나 전주처럼 거대한 돔을 만들어 특별관을 꾸리는 게 전부다. 영화 상영의 특성상 레드카펫 행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내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동진은 날이 좋은 달밤에 바다 바로 옆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영화제를 진행한다. 굿즈나 먹거리를 파는 부스도 소규모로 운영되고, 초대형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것 외에는 다른 행사나 선택지가 없다. 말 그대로 독립영화만의 축제다.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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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극장인데다 모든 영화가 무료로 상영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크지 않으면 진입장벽이 높을 수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동아리 연시조차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아는 이가 적었다. 소규모인데다 아는 사람만 조용히 다녀오는 영화제라 연시에서 자체적으로 사람을 꾸려 다녀온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영화제를 포기할 수는 없어 급하게 다른 친구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밤에 야외로 상영하는 영화제인 만큼 혼자 떠나기엔 걱정과 부담이 많았다.

마침 오랜 유학생활 탓에 국내 여행을 한 번도 다녀온 적 없는 친구로부터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신입생 때 총학생회 선본에서 만난 사이라 오래 알고 지냈지만 과 동기들처럼 지속적으로 만남을 이어오진 못했다. 선본은 선거에서 떨어졌고 모두 자신의 공동체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함께 공유했던 가치관과 열정을 불태운 시간들이 진하게 남아 가끔 얼굴을 보고 지냈는데, 여행을 가면 어쩔 수 없었던 간극이 조금은 메워질 것 같았다. 여러모로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정동진 기차역의 낭만과 바로 옆 바다의 풍경을 열심히 묘사하며 친구들을 설득했다. 다행히 착한 친구들은 영화제 덕후를 도와준다는 셈 치며 함께 여행 계획을 세워주었다. 물론 낮에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밤엔 영화를 본다는 것 외에 다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디어 영화제가 열리는 날, 당일에 군대를 전역하는 친구를 제외한 네 명이 먼저 정동진으로 출발했다.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은 사이도 있지만 몇 년 만에 얼굴을 보는 친구도 있어 약간의 어색함과 친밀함이 공존했다. 그럼에도 바다로 떠나는 기차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면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신나게 근황을 이야기하고 나는 늘 가깝게 지낸 친구와 책을 나눠보며 조용하고 편안한 설렘을 공유했다. 학생회라는 하나의 단체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던 만큼 우리는 각자의 색이 강해도 늘 불편하지 않게 어우러졌다. 사실상 영화를 보고 싶은 친구는 두 명이었고 나머지 세 명은 바다가 목적이었다. 여행을 다니면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기 십상이지만 우리는 3일 내내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저녁엔 영화를 보았다. 각자 다른 취향이 있어도 그렇게 어우러져 모두가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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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엔 더운 날씨 때문에 바다 밖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여유롭게 수영을 하고선 이제 막 군대에서 전역을 하고 온 친구를 만나 개막식에 갔다. 꽤 넓은 초등학교 운동장이지만 관객들이 계단까지 가득 차있었다. 돗자리나 모기장을 챙긴 관객들은 여유롭게 누워 정동진의 밤하늘을 즐기고, 미처 챙기지 못한 관객들도 계단에 정겹게 모여 앉았다. 단편영화 5편과 장편영화 1편이 마련되어 있었다. 첫 번째 영화 ‘Balloon(2018)’은 5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아이가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풍선을 가지고 노는 이야기였는데, 영화제의 첫 시작인 만큼 모두 꿈에 부풀어 구름 위를 떠도는 기분으로 영화를 관람했다. 두 번째 영화 ‘스트레인저(2018)’는 어린 아이를 납치하려는 스릴러물이었다. 복선을 하나씩 회수하면서 어린 아이가 실은 치매에 걸린 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독은 온전히 그 사람의 입장에 있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는데, 영화의 특성을 사용해 한 사람의 입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아이가 노인이었고 납치범은 그의 아들이었다는 반전이 공개될 때 관객들은 함께 탄식을 뱉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단체 관람의 묘미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세 번째 영화 ‘갓건담(2019)’과 네 번째 영화 ‘주근깨(2019)’ 역시 이색적인 영화였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지만 쉽지 않고, 비극적인 사건에 힘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개성적으로 표현했다. 비극과 희극이 절묘하게 섞인 우리의 삶과, 청소년기의 강렬한 충돌과 감정들이 스크린 밖으로 툭툭 튀어나왔다. 특히 ‘주근깨’에서 여러 층위의 억압에 억눌려있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능동적으로 내리며 친구를 구원하고 스스로도 구원하는 결말은 가슴에 오래 남았다. 마지막 단편영화 ‘박미숙 죽기로 결심하다(2019)’도 어떤 영화라고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영화였다. 청년을 대변하는 주인공 미숙은 꿈에 그리던 센느강을 포기하고 한강에서 죽음을 결심하는데, 일상을 평범하게 그리는 것 같다가도 톡톡 튀는 기적이 순간마다 자리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무거운 면들과 달리 유쾌하고 귀여운 톤이 대조되는 영화였다.

아쉽게도 마지막 장편영화는 보지 못한 채 첫날의 영화제를 마무리했다. 독립영화가 처음인 친구들에게 다섯 편 이상의 영화를 강요할 수 없었다. 내일은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친구들이 더욱 즐겁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하며 시끌벅적한 초등학교를 나섰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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