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문학동네

ⓒ위클리서울/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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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정다은 기자]  이 소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어느 가족의 우물에 갓난아기를 버리고 사라져버리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아빠 앨버트, 엄마 리타, 세 아이 버지, 테스, 잭으로 이뤄진 주인공 가족의 단란한 저녁 시간에 돌연 묘한 긴장이 감돈다.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우물 양동이에 시퍼렇게 변한 아기의 시신이 딸려오지만 한편으론 분주한 가족의 일상도 지체 없이 시작되어야 한다.

하얀 목화밭과 검은 광산이 공존하는 1930년대 탄광 마을의 삶은 가난하고 바쁘다. ‘우물 여자’의 정체를 쫓는 미스터리는, 탄광에서 2교대로 일하는 앨버트, 세 아이를 돌보며 새벽 소젖 짜기부터 저녁 손바느질까지 해내느라 쉴 틈 없는 리타, 부산하고 명랑한 세 아이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어 이야기의 결말부까지 긴장감 있게 흘러간다.

당시 탄광 마을의 삶에는 가족의 사랑과 헌신, 이웃과의 연대, 참된 노동의 가치가 생동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생계와 훈육을 위해 부모로서 부단히 노력하는 앨버트와 리타, 탄광 사고로 시력을 잃은 동료를 위해 힘을 모으는 광부들, 불운이 닥친 앨버트의 가족을 위해 저마다 형편에 맞게 위로를 전하는 이웃들, 이러한 어른들의 선한 영향력을 받으며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 작가는 가부장적 분위기와 인종차별이 잔존하는 시대의 한계 안에서 각 인물들의 강인한 면모와 당면한 한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그로써 인간이기에 가능한 근면과 선함이 깃든 삶의 가치를 일깨우며, 미스터리라는 긴장의 끈 위에서 고결하고 애틋한 가족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소설가로서 진 필립스의 뛰어난 관찰력과 묘사력은 『밤의 동물원』(문학동네, 2018)에서 무장강도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엄마와 어린 아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 호평받은 바 있다. 『우물과 탄광』에서 이목을 끄는 점은 작품 전반에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대비의 방식이다. 시골 생활의 아름다움과 지독한 가난, 시원한 우물과 매캐한 탄광, 하얀 목화밭과 초록 채소밭과 시커먼 광산, 탄광 지하에서 일하느라 창백한 앨버트의 얼굴과 마당과 텃밭에서 일하느라 거칠게 탄 리타의 얼굴, 마을 사람들에겐 죽음이지만 ‘우물 여자’에겐 생이기도 했던 미스터리. 작가는 이 수없는 대비의 면면을 세심하게 엮어나가며, 소설에도 우리의 삶에도 ‘정답은 하나일 수 없다’는 절묘한 진리를 새삼 일깨운다.

한편, 아이들의 귀엽고도 진지한 심리와 행동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진 필립스의 강점이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테스는 세상을 초콜릿케이크와 병아리가 가득한 아름다운 곳으로 느끼며, 답답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흙마당을 뛰놀며 남동생 잭을 골탕 먹일 궁리를 하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개울가에 나가 수영하는 여자아이다. 버지는 자신이 자란 탄광 마을과 가족만 알며, 매미 허물을 옷깃에 브로치처럼 달고 다니던 순수한 소녀에서 그 너머를 경험해나가며 더 큰 세상을 꿈꾸는 여성으로 성장한다. 진 필립스는 테스와 버지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촘촘하고 사려 깊게 그려내는데, 이 탁월함은 소설가로서 갖춰야 할 관찰력과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1930년대 미국의 탄광 마을은 산업의 흥망에 좌우되는 인간의 삶, 경기 침체와 정치적 새바람, 백인과 흑인 노동자의 차별 문제로 들끓는 용광로였다. 뉴딜 정책으로 경기 부양의 바람이 불지만 은행은 파산하고 사람은 자살하고 가게는 잇달아 폐업한다. 흑인 광부는 짐승처럼 부려지고 백인 광부 역시 극한의 노동량을 감수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흑백이 함께 뭉쳐야 한다는 변화의 필요를 감지하기도 한다. 흑백이 한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고, 급여 창구에 서야 하는 줄도 다르지만, 위험한 일터로 출근해 부디 가족 품으로 무사히 퇴근하기를 기원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진 필립스는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당시 탄광 현장의 모습과 광부들이 감내한 막대한 피로를 실감나게 그려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비정규직 문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환경, 갈수록 깊어가는 노동의 박탈감과 허무를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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