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탐방기] 정동진독립영화제 2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제 21회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렸다. 작년 8월 2일부터 4일까지 바다 옆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여름의 축제였다. 더위마저 낭만이 된 그 시간이 지금의 추위를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정동진독립영화제 탐방기의 마지막 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첫날 영화제를 마무리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도, 평소에 잘 보지 않는 영화를 본 친구도 어찌되었든 신이 났다. 친구들끼리 돗자리를 깔고 누워 밤하늘에 펼쳐진 영화를 보는 경험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이나 알쏭달쏭했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해석과 감상을 공유했다. 그리고 드디어 군인에서 민간인이 된 친구를 위해 작은 파티를 준비했다. 신입생 때 만난 우리가 제대 파티라니.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의 철없음은 그대로였다.

여행 내내 주고받은 대화라고는 옛날에 있었던 웃긴 일이 반,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가 반이었다. 사실상 쓸 데가 없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를 지나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마주한 우리는 가장 여유가 없고 힘들다는 시기에 있다. 여전히 그런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리를 보면서, 어쩌면 가볍고 보잘 것 없는 대화가 쌓인 시간들이 우리가 힘을 내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달려 꿈에 그리던 목표에 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행복을 찾고 동력을 충전하는 것도 우리의 삶이자 준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예술로 인정받지만 여전히 다른 장르에 비해 어렵지 않고 대중에게 장벽이 낮다는 이유로 평가 절하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이기 때문에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은 현실 감각이 부족한 한량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영화제다. 좋아하는 일을 향한 열정이 들썩거리는 현장의 분위기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중독성과 매력이 있다. 상업성이나 시장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독립영화제는 그보다 더하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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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편에서 이야기했듯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영화 상영이라는 영화제의 본질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여러 극장에서 영화를 골라보거나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는 다른 영화제들과 달리, 대형 스크린 하나로 영화를 상영한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영화제를 돌아볼 수 있는 팝업전시회, 독립영화 배우들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영화 수업 프로그램도 있다. 특별 이벤트로는 감독과의 대화, 땡그랑동전상, 정동진 별밤우체국, 기분 좋은 밥상, 기념사진 등도 있다.

가장 유명한 ‘땡그랑동전상’은 관객이 감명 깊게 본 영화에 동전으로 투표하는 시스템이다. 동전의 금액이 아닌 개수로 수상작이 결정되어 독립영화 특유의 감성과 유쾌함이 묻어난다. 투표에 사용된 동전은 수제 트로피와 함께 부상으로 지급되어 좋은 영화에 투표도 하고 동시에 후원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독립영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엽서를 발송하는 ‘정동진 별밤우체국’ 또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가장 독특한 것은 영화제의 마지막 날 사진을 찍는 기념사진 행사다. 영화제와 관련된 영화인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모두 모여 사진을 찍는 영화제가 세상에 또 있을까. 대규모 영화제가 아닌 만큼 아기자기하고 개성적인 프로그램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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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되는 영화들 역시 독특하다. 다른 영화제는 주제나 특성별로 섹션을 나눠 세계적인 거장의 컬렉션이나 그해 영화제의 정신을 가장 잘 담아낸 영화들을 모아 상영한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독립영화만의 잔치인 만큼 극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등의 기본적인 기준으로만 나누어 선정한다. 그리고 공모된 작품들을 모아놓고 보니 어떠한 경향이나 흐름이 있었다는 평이 뒤에 나온다. 영화제의 특성에 맞춰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좋은 영화를 선정하고 그 흐름을 파악하는 식이다. 이번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눈에 띄는 경향은 ‘여성’과 ‘돌파’라는 키워드였다. 각기 다른 배경과 연령대의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문제와 연대, 또는 청년 세대가 고달픈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돌파하기를 선택한 영화가 많았다는 평가다. 정동진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자유로운 형식과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도 여럿 있었다.

둘째 날은 ‘기대주(2019)’, ‘30초간(2018)’, ‘봄밤(2019)’, ‘해미를 찾아서’(2019)‘, ’할머니의 케이크(2018)‘, ’다운(2018)‘까지 총 여섯 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기대주‘는 아마추어 수영대회 선수를 뽑는 시합에서 중학생 소녀와 겨루게 된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 모두가 그녀에게 우승을 양보하고 아름답게 물러날 것을 은근히 강요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기회가 더욱 줄어들 것을 아는 그녀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선생님까지 어린 소녀에게만 적극적인 코칭을 할 뿐 그녀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는데, 모두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소녀가 그녀에게 말을 건다. 선생님이 알려준 중요한 노하우를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감독은 연출의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이 꺼지는 순간까지 달리고 싶은 사람도 있다고. 우리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해묵은 교훈마저 체화하지 못한 채 스스로와 타인에게 부당한 ‘나잇값’을 강요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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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각색해 재현하는 부류의 영화는 우리의 삶과 태도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봄밤’은 풋풋한 첫사랑을 담은 퀴어 영화이고, ‘다운’은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부부의 이야기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고 갈등하는 청춘과 부부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킬 수 있었다. 뜨거운 박수를 받은 영화 ‘해미를 찾아서’는 대학 내 문단계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와 연대인들이 벼랑 끝에서도 투쟁을 계속하는 이야기다. 맞서 싸우는 학생들의 명단을 훔쳐오라는 강요를 받는 주인공은 그동안의 힘들었던 시간과 위협이 섞인 강요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다 끝내 발언하고 증언하기를 택한다. 실제 대학과 문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참고해 섬세하게 다듬은 각본이, 맞서 싸우기를 택한 이들의 일상을 다큐멘터리적으로 담은 영화적 시선이 빛나는 영화였다.

온몸을 뜨겁게 만드는 영화들을 끌어안은 채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 아쉽게도 마지막 날의 영화들은 보지 못하고 기차에 올랐다. 즐거운 추억과 영화로 가득 찬 마음을 하나하나 되짚고 꼭꼭 씹어 소화하고 싶을 만큼 충만한 기분이었다. 영화는 재현과 기록의 예술이다. 중요한 무엇을 선택하여 재현하고 특정 관점에서 각색이 된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꼭 글쓰기와 닮았다. 나 또한 365일 24시간의 일상 중 무엇을 선택해 각색하고 글자라는 매체를 통해 기록을 남긴다. 오래 인연을 이어온 친구들과의 여행담을, 내가 본 영화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남기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앞으로도 여행기와 영화제 탐방기는 계속된다. 평범한 일상은 특별한 글이 되고, 특별한 일상은 또 평범한 글이 될 테다. 영화와 여행을 통해 감정과 생각을 체득하듯, 나의 글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생각할 거리를 남겨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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