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은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였습니다. “어려서는 영특했고 커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幼而穎悟 長而好學)”라는 자신의 평가가 있지만, 다산은 어린 시절은 많은 기록이 없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연보(年譜)에는 “네 살 때에『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했다. 7세에 5언 시를 지었다. 9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0세에 경사(經史)를 배우다.”라는 내용이 있을 뿐이며, “15세에 장가가다.”라는 내용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학문의 잘못된 이론을 비판하고, 썩은 세상을 통렬하게 비판함이야 칼날처럼 무섭게 열거했고, 근엄하고 철저하게 자기관리에 뛰어났던 다산이었기에, 수더분한 인간미 같은 것은 없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데, 몇 군데에 나오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다산 역시 보통의 인간이었고, 여느 아이들과 구별할 수 없게, 개구쟁이 시절도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다산은 9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형수의 돌봄으로 10세 전후의 시절을 보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니, 약용은 그때 겨우 9세였다. 머리에 이가 끼고 얼굴이 구질구질하여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을 해주었으니 약용은 몸을 빼내 달아났다. 형수는 빗과 세숫대야를 들고 도망친 곳으로 따라와 다독이며 씻으라고 애원하였다. 달아나면 붙잡고 울고 웃으며 꾸짖고 놀리고 하여 시끌벅적 온 집안이 한바탕 웃음판이 되었다. 다들 약용을 얄미운 아이로 보았다.(丘嫂恭人李氏墓誌銘)”라는 글에서, 개구쟁이로 온 가족을 괴롭히던 일을 기술했습니다. 형수의 일생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형수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고, 다산은 아버지의 새로운 측실(側室)로 들어온 서모 김 씨의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서울에서 처녀 김 씨를 맞아 측실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 20세였으니 그분이 서모 김 씨이다. 서모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약용의 나이는 12세로, 머리에 이가 많고 부스럼이 잘 생겼다. 서모는 손수 빗질을 해주고 그 고름과 피를 닦아 주었다. 속옷이나 바지, 적삼이나 버선도 빨고 꿰매며 바느질하는 수고도 서모가 도맡아 하다가 약용이 장가를 든 뒤에야 그만두었다.(庶母金氏墓誌銘)”라고 말하며, 어린 시절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리고, 부스럼이 많아 피고름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10세 전후 큰형수를 괴롭히고 집안 식구들에게 미움을 받던 개구쟁이 다산을 그런 글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현자(賢者)의 우뚝한 지위에 오른 다산, 그도 인간이었기에, 어린 시절에는 개구쟁이로 장난치기 좋아했음을 알게 되었고, 태어나기 전의 천재가 아닌, 후천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용기를 지니고 포기와 좌절을 알지 못했기에 그만한 학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다산의 뛰어난 인품을 알게 해주는 글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남존여비의 불평등한 세상에서, 자신을 돌봐준 어린 시절의 은인인 서모와 형수에 대해 글을 지어 그들의 공덕을 칭찬할 줄 알았던 다산의 마음입니다. 어머니 없이 자라는 자신을 돌봐주고 보살펴주었던 서모와 큰형수의 은혜를 잊지 못해 뛰어난 글솜씨와 미려한 문장으로 그들의 일대기를 곱고 아름답게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무명의 여인들이 다산의 글을 통해 역사적으로 영원히 살아있게 해준 사실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시 다산은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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