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0.02.10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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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 오른발 이야기

드디어 석고 붕대를 풀었다. 석고 안에 갇혀 있던 내 오른 발이 오징어 냄새를 풍기며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좀 고약하기는 했다. 의료진들은 늘 겪는 일인 듯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그들의 본업에만 충실했다. 한 달 남짓 나는 오른발 대신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홀로 집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업이라 힘겨운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1인용 포장 식재료들을 주문해서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것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서 모처럼의 휴식시간이기도 했다. 가까이 사는 친누나가 뼈에 좋다는 사골을 우리고 밑반찬과 김치를 갖다 주며 이런 저런 내 뒷바라지를 하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이럴 때는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만약에 내 가족이 있었다면 나의 병수발을 누나에게 맡기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누나와 나는 십년 가까운 터울이 진다. 굳이 십년의 세월이 이유가 아니어도 누나와 나는 크게 친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나는 남자고 공부를 해야 할 놈이니 여자인 누나와 놀지 말라는 말을 가끔 하셨다. 그런 엄마의 영향이었는지 누나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어느 날 누나는 운동을 한답시고 유도복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고 무슨 이유인지 엄마에게 혼나는 일도 잦았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자주 술을 먹고 늦게 다녀서 엄마의 속을 태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나는 결혼을 한다고 했고 엄마와 나를 남겨 놓은 채 훌쩍 출가외인이 돼버렸다.

누나와 내가 처음으로 남매의 정을 나누게 된 건 몇 해 전 엄마 때문이었다. 이전부터 엄마가 좀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그 날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마의 히스테리가 심했다. 누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폭염은 기승을 부렸고 건강한 사람도 지치게 만드는 한 여름 더위에 엄마는 점점 정신을 놓고 계셨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결정과 함께 누나는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자고 했다. 처음에는 누나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보살핌을 받으며 회복되어 가는 엄마의 모습에 강하게 밀어붙이던 누나의 결정이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엄마의 일을 의논하면서 누나와 대화할 시간이 많았고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퍼즐 맞추듯 되짚어 보니 아들만 바라보던 엄마의 슬하에서 사랑을 갈구하던 작고 여린 소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은 생각에 그동안 오해했던 누나의 모습들이 이해가 되었다. 자식이니 도리는 지킨다며 누나는 엄마가 계신 요양원을 꼬박꼬박 방문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끔 누나가 갈 때 같이 가곤 했는데, 그런 누나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니 다친 발이 오른발이가? 나는 왼발이다.”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 왼발 이야기

화가 단단히 난 듯 했다. 사람 좋은 중년의 아저씨마냥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다던 동생. 가끔 자기의 주장을 펼칠 때도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변변치 않은 밑반찬이라도 몇 가지 해주면 돌아서기가 바쁘게 맛있게 다 먹었다며 행복한 이모티콘으로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돈독한 남매의 정을 나누며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보다 더 기댈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친정붙인데 내가 술김에 꼬장 좀 부렸기로서니 한 달 넘게 연락을 끊는 다는 것이 그저 서운했다. 어떻게 풀긴 풀어야겠는데 김치라도 몇 포기 담아서 모르는 척 넘어 가볼까 고민하던 중 마침내 동생이 전화가 왔다.

“누나… 내가 좀 다쳤는데… 수술을 해야 되는데… 근데 보호자가 서명을 해야 돼서….”

쫘식아, 내가 니 하나밖에 없는 보호자다 임뫄! 라는 우쭐함도 있었고 걱정도 되었고 그 덕택에 용서받았다는 기분과 함께 병원에 갔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거래처 납기를 맞추느라 컴퓨터 앞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고 퇴근하다가 빗길에 계단에서 넘어졌단다. 양쪽 복숭아뼈가 다 으스러지고 발목이 어느 방향으로 틀어져서 수술 후 약 한 달 동안은 통깁스를 해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여태 살면서 크게 다쳐 보거나 아픈 적도 별로 없어서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발목이 돌아 간 동생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어 최대한 의연해지려 애를 썼다. 붓기가 빠지고 난 뒤 수술을 했고, 다행히 경과가 좋아서 통원치료를 허락받고 동생은 퇴원했다. 일상은 다시 편안해졌다. 동생과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고 있던 어느 날, 이런… 이번엔 내가 넘어졌다.

난타팀 신년회가 예정되어 있던 날 호출한 택시가 도착했다는 전화에 급히 신발을 신고 나가려다 현관에 벗어 놓은 슬리퍼에 미끄러졌다. 발이 좀 아프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이 갈수록 부풀어 오르고 걷는 게 불편해지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수업 진행도 어려워 휴강을 해야 했다. 의사는 발등에 골절이 됐다며 부목을 착용하고 일주일 뒤 경과를 지켜보며 수술결정을 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처방을 내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목발을 짚고 다니는 동생에게 김치를 가져다주고 왔는데 동생이 쓰던 것과 똑같은 목발이 내게도 생겼다. 당장 외부 활동을 해야 하는데 목발을 짚고 어떻게 다녀야 할지, 수업 진행은 어떻게 해야 할지, 거동불편한 동생 수발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단이 돼버린 느낌이었다. 부목사이로 보이는 푸르딩딩한 발가락을 보고 있자니 정신은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왼발을 다쳤기 때문에 운전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 그거라도 감사해야지. 근데 동생은 오른발이었던 것 같은데… 더 이상 도와줄 형편도 못 되니 알려는 줘야겠다 싶어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니 다친 발이 오른발이가? 나는 왼발이다.”

 

- 에필로그

여기는 참 조용하다. 주변에 시끄러운 게 하나도 없어서 좋다. 나와 같이 있는 이들도 한결같이 말이 없고 그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거나 그냥 앉아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같고 잊힌 기억들을 더듬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들려오는 젊은이의 목소리는 주위를 환기시킨다. 참 살가운 목소리다. 여기서는 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삼시세끼를 얼마나 잘 챙겨주는지 게다가 틈틈이 간식도 준다. 젊어서는 내 새끼들 해 먹이느라 부엌을 벗어날 수 없었고 좀 더 늙어서는 우리 아들 공부시키느라 운영한 하숙집이 또 나를 부엌으로 가뒀다. 밥하는 거라면 아주 지긋지긋 했는데 여기는 누군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밥을 챙겨준다. 여기는 하숙집인가. 나는 하숙비를 낼 돈이 없는데 걱정이다. 다만 거슬리는 게 있다면 내 앞에 있는 저 할망구가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지도 나만큼 늙었구만 늙은이 처음 보는 것처럼 자꾸 나를 쳐다본다. 오늘 우리 딸이 다녀갔다. 딸은 잘 웃지 않는다. 나는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은데 딸은 왔다가 금방 가버린다. 무심한 년 같으니. 우리 아들 이야기도 좀 해주고 그러지. 장가는 언제 갈 건지 직장은 잘 다니는지. 우리 아들 못 본지도 한참 됐네. 근데 오늘 딸의 발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걸음걸이도 불편해 보였다. 넘어졌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아까 딸이 젊은이와 이야기 하던 것이 생각난다.

“현관에서 넘어졌어요. 그래도 왼발이라 운전하는데 지장이 없어서 왔어요. 얼마 전에는 저희 남동생이 넘어져서 다쳤는데 걔는 오른발이네요. 엄마 걱정한다고 못 오겠대요.”

내 새끼들이 다쳤구나. 이를 어쩌나. 밥에 고깃국이라도 끓여 맥여야 되는데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근데 앞에 저 할망구는 왜 자꾸 나를 쳐다보는지 모르겠네.

가만있자… 오늘이 며칠 인고… 지금 계절이 봄인가…. 여기는 조용해서 참 좋다.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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