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영사기 필름박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광주에 광주극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광주에 광주극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아마 내 나이 열두 살 시절의 키가 그렇게도 작았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고, 무등극장 영사실 조수 신분이었던 그 시절의 내가 조수 신분을 박탈당하고 쫓겨나야만 했던 이유도 아마 제대로는 영영 이해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어떻게 일 미터나 넘었었을까?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일 미터 십삼 센티 정도? 눈을 감고 가만히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았었다. 학교 교실에서도 그랬고, 소풍을 갈 때도 그랬고, 열 명 이상이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나는 항상 맨 앞줄에 서거나 앉았었다. 지금이야 뭐 백칠십에 근접한 키를 갖고 있고, 그래서 동년배들이건 선후배건 만나도 별 위화감이 없지만, 열두 살 즈음의 나는 그랬다. 작았다. 너무 작아서 도토리처럼 굴러다닌다는 소리를 꽤나 자주 듣는 서글픈 신세였더랬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의 나를 발견하고 나니 새삼 감개가 무량하다. 이 무량한 감개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돌린다고 하면 무례일까? 무례거나 말거나 내 감정이 그렇다는 것만은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지워지지 않을 역사가 도처에서 새롭게 이루어져 나가던 2016년 겨울 그날의 감동을 나는 아마 내가 살아 있는 한 잊지 못할 것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켜진 촛불이 광주의 금남로까지 이어져 왔던 것인지, 광주의 금남로에서 켜진 촛불이 서울 광화문으로 올라갔던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내가 알지 못한다. 하긴 선후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랴. 중요한 것은 촛불이요 함성 그 자체였다.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에너지가 막 생겨나는 것만 같은 그것은 희망이요 꿈이요 설렘이었다.

 

켓박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티켓박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영사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영사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금방 뭔가가 올 것만 같은, 있을 것만 같은 설렘이 아직도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태에서 촛불이 꺼지고 집회가 끝나면 그렇게도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뜻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못 하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아무 얘기나 막 떠들어대기도 한다.

그런 와중의 어느 순간 나온 것이 영화 얘기였다. 요즘은 영화가 자본의 지배를 지나치게 많이 받는 까닭에 비주얼만 화려할 할 뿐 내용이 빈곤하다는 등의 이야기가 한참이나 이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광주극장 얘기를 꺼냈다. 독립다큐와 예술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고풍스런 극장이 있는데 그 역사가 무려 팔십 년도 넘었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듣느니 처음이었다. 팔십 년대에 5.18 관련 행사로 찾을 때도 들어보지 못했고, 이른바 귀농을 한 뒤에도 광주에 광주극장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게 있었다니. 일제의 광풍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몰아치는 시절 1930년대에 지어진 극장이 지금도 의연하게 남아서 영화를 돌리고 있다니, 내가 이렇게도 무지몽매한 삶을 끌어가고 있었구나 하는 자괴감에 조금은 괴롭기도 했다.

알고 보니 가난해도 화려하게 가난한 극장이었다. 단순한 극장이라기보다 영화 박물관 같은 극장이었다. 요란한 상업영화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까닭에 까딱하면 굶어죽기 십상인 극장이었다. 겨울에는 난방도 제대로 가동할 수 없어서 무릎 덮개용 담요를 비치해놓고 하나씩 들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 꼭 다시 갖고 나와 달라고 당부해야만 하는 극장이었다. 몇몇 뜻있는 후원자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극장이었다. 쓰러지지 말고 의연하게 꼿꼿이 서 있으라는 뜻으로 정부에서 지원금 수혜 대상으로 선정하기도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 시절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자격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은 극장이기도 했다.

좋다. 다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내게는 있었다. 광주극장의 과거와 현재 못지않게 중요한, 아니 어쩌면 몇천 배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는 내 자신의 열두 살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영사기 두 대가 거기에 있었다. 그랬다. 이층 로비에 전시된 영사기 두 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대로 곧장 열두 시절로 공간이동을 하고 있었다.

한 줄만 읽으면 지겨워서 더 이상은 쳐다도 보고 싶지 않은 그놈의 국민교육헌장, 그따위 것을 외우지 않았다고 두들겨 패는 선생님 나부랭이는 꼴도 보기 싫어서 무단가출을 감행한 열두 살의 내가 맨 처음 들어간 곳이 광주의 무등극장이었다.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위치도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절의 무등극장은 내게 천국처럼 다가왔다. 천국은 하루도 채 안 돼서 지옥으로 신분변환이 되고 말았지만, 하루도 채 안 되는 그 시간은 어쨌든 황홀경 그 자체였다.

 

광주극장 2층 계단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광주극장 2층 계단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광주극장 객석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광주극장 객석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고창이라는 촌구석에서 천막을 치고 돌리는 가설극장 영화나 두어 번 보았을 뿐이고, 학교에서 단체로 읍내까지 십리나 걸어가서 본 반공영화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정도가 영화에 관한 이력의 전부였던 내게 그 당시 일류극장이었던 무등극장의 로비에 붙어 있는 각종 포스터와 영화 소품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눈이 홱홱 돌아가는 요지경이요 만화경이요 신세계인 것만 같아서 나는 그만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자, 나는 이제부터 영화를 실컷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르면 몰라도 아마 하루에 수십 편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도 한도 없이 영화를 보고, 그리고 나중에 고향에 가서 실컷 자랑을 해야지.

무엇보다 그것이 기뻤다. 고창의 촌놈 친구들한테 자랑할 수 있다는 거, 자랑할 수 있는 꺼리를 원도 한도 없이 확보했다는 거.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희망을 안고, 설렘을 가슴이 터지도록 끌어안고 들어간 곳이 영사실이었다. 극장의 맨 꼭대기에 무슨 감옥처럼, 아니 오소리굴처럼 도사린 작은 방구석, 거기에 영사기 두 대가 설치돼 있었고,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영사기사가 있었고, 라면 따위를 끓여먹는 작은 석유곤로가 있었다.

영화를 하루에 수십 편은커녕 한 편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날 바로 알았다. 영사기 한 대에 걸려 있는 필름 한 통이 다 돌아가면 즉시 다른 영사기를 가동시키고, 다 돌아간 필름 통을 꺼내서 되돌리기 장치에 걸어놓고 손으로 정신없이 되돌린 다음 다시 영사기에 걸어놓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필름이 한창 돌아가는 중간에 툭 끊어지기라도 하면 번갯불에 콩이라도 구워먹을 듯이 재빠르게 움직여야하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좋은 게 있었으니, 객석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밝으면 밝은 대로 뭔가가 보이고,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뭔가가 보이는 그것은 정말이지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물론 그 진귀한 구경거리는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미술부라 불리는 간판실에서 간판 기술을 배우는 중인 형이 틈만 나면 영사실로 들어와서 그것을 보고 있었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오징어 땅콩, 오징어 땅콩 소리를 외친다고 하는 매점 소속의 나와는 동갑네기 소년과 소녀 또한 틈만 나면 달려와서 스케치북 한 권 정도의 넓이밖에 안 되는 유리창에 얼굴을 처박고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광주극장 자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광주극장 자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례로 한 번씩 보고 난 뒤에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다시 보고, 다시 토론을 벌였다. 이를테면 어디에 앉아 있는 어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디에 어떤 자세로 닿아 있는가, 여자의 머리는 얼마나 긴밀하게 남자의 몸에 어떤 형태로 밀착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이들의 관계는? 하는 식의 뭐 그런 토론이었다.

객석이 천 개 가까이나 되는 대형 극장이다 보니 하루에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관객들 중 최소한 절반은 남녀 커플이었다. 때문에 보고 또 봐도 보아야 할 연애상황은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그냥 남의 연애 형태를 구경만 하는 게 아니었다. 하긴 그냥 구경만 하기로 한다면 이내 싫증이 나서 더 이상은 보고 싶지도 않을 것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남의 연애 장면을 관찰해 왔던지 그들은 이제 추리와 상상, 공상, 분석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한 번 척 보기만 해도 그들은 어떤 커플이 연애 초보인지 선수인지, 몰래 하는 연애인지 까놓고 하는 연애인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겨 있었고, 심지어는 사랑을 빙자한 사기꾼을 가려내는 안목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얘기에 따르면 어두우면서도 밝은, 밝으면서도 어두운 공간을 애타게 필요로 하는 남자가 있고 여자도 당연히 있단다. 그들은 거의 상습적으로 극장을 드나드는데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아예 극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남녀도 있다. 영화가 다 끝나서 불이 켜졌는데도 일어서지 않고 의연히 버티기도 하고, 새로운 좌석 주인이 나타나서 버틸 수가 없는 경우에는 스크린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맨 앞줄로 자리 이동을 하거나 그런 자리조차 안 남아 있을 땐 바닥이나 계단에 주저앉아서 연애행각을 벌인다.

당연하게도 그런 비상식적인 커플들은 평범한 연애의 관계가 아니다. 남녀가 바싹 붙어 있으면서도 더 붙어 있고자 애를 태우는, 마치 상대의 가슴에 구멍을 뚫고 쏙 들어가서 숨기라도 할 듯이 안절부절 못해하는 커플은 물어볼 것도 없이 불륜관계이다. 보라는 영화에는 관심이 없이 필요 이상의 과도한 액션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남자는 십중팔구 여자를 등쳐먹는 제비이고, 여자가 그렇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남자를 등쳐먹고자 하는 꽃뱀이라는 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무한히 놀라고 있었고, 나도 이제 곧 그런 안목을 갖는 날이 오려니 하고 잔뜩 흥분해 있었지만,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내 눈에는 그저 다정한 연인들의 연애하는 풍경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내 몸은 어느새 상처투성이가 돼 있었고, 바야흐로 쫓겨날 운명에 처해 있었는데도 나 자신은 모르고 있다가 어느 하루 불쑥 해고 통보를 받고 말았다.

 

무릎덮개담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무릎덮개담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는 사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사고는 극장 영사실 조수 임무를 부여받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일어났다. 첫날은 영사기사가 내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었던 덕분으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둘째 날도 역시 영사기사의 날카로운 눈매와 간섭이 있었기에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지만, 셋째 날부터 영사기사는 이제 다 알았지? 하는 투로 나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

사람이 뭔가를 아주 모를 때는 긴장해서 조심에 조심을 다하지만, 어설프게 뭔가를 조금 알았다 싶어지면 건방이 생겨서 휙휙 날아다니고자 하기 마련이었다. 당시의 내가 꼭 그와 같았다. 영사기 한 대의 필름이 다 돌아가면 재빠르게 필름 통을 빼서 되돌려야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내게 영사기는 그 덩치와 키가 엄청나게 컸고, 때문에 항상 의자를 딛고 올라서야만 했다.

모든 것을 수동으로 작동하는 시절이다 보니 필름 한 통이 다 돌아가면 영사기사는 다른 영사기의 버튼을 누르고, 스크린에 투사되는 빛의 각도를 조절하는 등 나름대로 미세하게 바빴다. 그 동안에 나는 의자를 딛고 올라가서 필름 통을 빼다가 되돌리기 작업을 한다. 만약에 필름이 돌아가는 중에 불쑥 끊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다람쥐처럼 잽싸게 뽀르르 의자를 딛고 올라가서 필름박스 뚜껑을 열고 필름 통을 꺼내서 영사기사에게 건네주고, 기사는 빛의 속도로 필름이 끊어진 부위를 잘라내고 붙여서 내게 건네주면 나는 다시 그것을 필름박스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가할 때는 한가하고 바쁠 때는 정신없이 바쁜 일이어서 넘어지고 자빠진다 해도 아파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사실로 나는 아프다고 징징대본 적이 없었다. 굴러 떨어져서 멍이 들면 멍이 든 대로, 피가 나면 피가 나는 대로, 무르팍이 찢어지면 찢어진 대로 그냥 한 번 쓱 문질러나 대고 쏜살같이 달려가서 남의 연애하는 장면을 조감하며 저들은 불륜관계인가 사기꾼관계인가 하는 뭐 그런 추리에나 열심을 파는 것이었다. 실로 그것은 흥미진진한 일이어서 영화 같은 것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인데 어느 하루 돌연 나가라는 말을 듣고 보니 석 달이나 흘러 있었다.

 

폐업 중인 휴게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너무 자주 굴러 떨어져서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굴러 떨어진 나 자신이 괜찮다는데도 안 된단다. 나가란다. 키가 더 큰 뒤에 오면 받아준다고,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면서 나가란다. 나는 당연히 슬펐고, 억울했지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멍들고 피 흘리는 내 자신이 괜찮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하는데도 왜 그만두라고 하는지, 왜 나가라고 하는지 그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값비싼 기계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얘기를 그들이 그때 했었을까? 어쨌든 내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다만 속이 상하고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 뒤로 엄청난 세월이 흘러서, 우연히 광주극장을 알고 찾아가서 옛날식 영사기를 접하고 보니 아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던 것이었다. 백칠십에 근접하는 내 키를 영사기 옆으로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세상에나, 의자 같은 것을 딛고 올라서기는커녕 팔을 쳐들 필요조차도 없이 필름박스가 그냥 손에 닿는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키 작은 소년이 의자를 딛고 올라갔다가 의자가 넘어지는 순간 영사기를 부둥켜안고 함께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영사기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랬다. 그때는 진실로 몰랐었다. 영사기 한 대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도 몰랐고, 열두 살의 내가 의자를 딛고 올라갔다가 의자와 함께 넘어지면, 넘어지기를 되풀이하면 어느 순간 영사기를 붙잡고 함께 넘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는 꿈에서도 해보지 못했다.

뭘 모르니까 쫓겨난 사실 자체만 크게 부각돼서 억울하고 섭섭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었던 것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의도하지 않은 도움으로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진실을 접하게 됐으니 글쎄 이걸 무슨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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