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 군주와 학자 신하
학자 군주와 학자 신하
  • 박석무
  • 승인 2020.02.24 11: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박석무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의 저서들을 읽다 보면, 탁월한 임금이자 뛰어난 학자이던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발견됩니다. 그렇게도 학문을 좋아하고 그렇게도 많은 독서를 했던 정조와 호학(好學)하고 호고(好古)하던 다산은 생각이 같고 마음까지 통해 물과 물고기의 만남과 같다는 수어지계(水魚之契)의 군신 관계였습니다. 다산의 인생을 연대기로 기록한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의 다산 39세(1799) 때의 기록이니, 그해 7월 26일 형조참의 벼슬에서 사직하여 벼슬에 있지도 않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때 정조는 48세로 참으로 많은 선정을 베풀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12월에 임금의 특별명령으로 ‘세서례(洗書禮:책 한 권 읽기를 마치며 여는 간단한 잔치)’ 때의 어제시(御製詩)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라는 기록에 이어지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에 임금이 온갖 나라의 기무(機務)를 살피는 여가에 독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매번 경서 한 권 읽기를 마칠 때마다 태빈(太嬪:정조의 어머니)이 음식을 장만하여 세서례를 하였는데, 민간의 아동들이 하는 습속을 따랐다. 이해 겨울에 임금이『춘추좌전』을 다 읽었으므로 태빈이 또 이 예(禮)를 베풀었다. 이에 다산이 불리어 들어갔다. 임금이 특별히 어제시를 내려주시며 화답의 시를 올리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은 많은 이야기를 하게 해줍니다. 

나라의 만기(萬機)를 살펴야 할 막중한 책임과 한치의 여가도 내기 어렵게 바쁜 임금의 일정에서, 틈만 나면 책을 읽는 군왕 정조의 학문 좋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고 이해할 사람이 신하 중에는 다산이라 믿고 그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올리라고 했으니 정조와 다산의 관계가 어떤 사이였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때때로 규장각의 아전을 보내 어떤 때는 어제(御製)를 써서 올리라고도 하고, 어떤 때는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라고도 하였다. 어제시가 한 달이면 두세 차례나 이르도록 끊이지 않았다.”라고 말하여 시를 지을 때마다 다산의 평가를 받고 싶어 하던 정조의 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런 임금에 그런 신하, 역시 ‘시군시신(是君是臣)’이 바로 정조와 다산이었습니다. 

1800년 봄, 39세의 다산은 영영 낙향할 계획으로 전원인 고향 마을 마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임금이 서울로 오라는 명령을 내려 부득이 서울에 왔더니 승지를 시켜 궁중에 교서(校書)할 장소를 새로 꾸몄으니 곧 돌아와 교서하는 일을 시키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어찌 그를 버리겠는가?(予豈捨渠哉)”라고 말하여 운명하기 직전까지도 정조는 다산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고 끝까지 자신의 곁에 두기를 그렇게도 원했음을 알게 됩니다. 

운명이란 알 수가 없습니다. 6월 그믐께면 다산을 다시 벼슬에 오르게 하겠다던 정조는 그믐 하루 전인 6월 28일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너를 한번 기어코 올려서 쓰겠다.”라던 정조는 형조참의에서 물러난 다산을 더 승급시켜 부리지를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쁜 중에도 50이 다 된 나이에『춘추좌전』을 정독하고 ‘책거리’의 잔치까지 베풀던 호학의 군주 정조는 호학의 신하 다산을 제대로 부리지도 못하고 떠났습니다. 여기서 조선 후기 시대의 가느다란 개혁의 빛은 끝내 발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