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옛날 옛적 촌놈의 연애행각 (4)

매화
매화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코로나19로 명명된 괴생물체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지만, 농사 준비가 한창인 산골 마을에서는 그냥 하나의 뉴스로만 들린다. 여기저기서 막 몰려드는 봄기운에 그만 주눅이 들어버린 것일까. 하긴 정월 대보름이 지나기도 전부터 도롱뇽은 알을 낳기 시작했고, 달력으로만 보자면 아직 꽃 피는 계절도 아니건만 꽃망울이 막 터지고 있으니 코로나19 그 녀석들도 아마 굉장히 당황했을 거라는, 그런 감수성 풍부한 소년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꽃망울이 터지는 계절이면 으레 떠올라오는 얼굴, 그녀가 저기 어디에 있다. 기억이 너무나 희미해서 윤곽은 하나도 안 잡히고 다만 하나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꽃망울 같은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을까? 일도양단해서 말하자면 아니었다. 그녀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그 어떤 감정의 징후도 없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그리워했던 것일 뿐이니 짝사랑이라 하면 말이 좀 될 수는 있어도, 첫사랑이란 명패를 걸어놓을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얼굴도 제대로 똑바르게는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나의 첫사랑이라고 박박 우긴다. 왜? 내 생애 최초로 여자를 의식하며 부끄러워한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부끄러운 마음으로 선물까지 샀지만 차마 직접 전할 용기조차 없어 우편으로 발송했으며, 내가 보낸 선물을 그녀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인조차 못해보고 혼자서만 전전긍긍, 속으로만 끙끙 앓아대며 보내지도 못할 편지만 수도 없이 쓰다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말았으니 이게 무엇인가.

가만히 돌아보면 나는 연애에 관한 한 실패의 달인이었다. 수많은 친척 누이들과 동생들과 그리고 친구들이 자리를 만들어주었지만 나는 그 좋은 자리를 한 번도 내 것으로 만들어보지는 못 했으니 글쎄 이건 뭐 실패의 달인이라는 말조차도 사실은 과분하다. 무지하게도 나는 한때 딸을 일곱이나 아홉 명씩 두고 있는 우리 집안 어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기도 했었다. 누나와 여동생들만 수도 없이 만들어놓고 연애의 기술 같은 중요한 것을 전수해줄 만한 형은 거의 안 만들어놓은 어른들이 그렇게도 무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산수유
산수유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물론 나중에 어렴풋이나마 알기는 했다. 연애의 기술은 누가 누구로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는 것을, 궁여지책으로 사들인 몇 권의 책을 통해서 알기는 했지만 그것을 안 뒤의 실망감 플러스 절망감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만 하다. 연애의 기술이니 사랑의 기술이니 등등 무수하게 쏟아져 나와 있는 그 방면의 책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응용할 만한 기술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서툴게 잘못 흉내나 내고 다니다가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서 헤어나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는 두려움을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시중에 나와 있는 그 방면의 지침서들은 모두가 그것을 쓴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 혹은 상상의 산물일 뿐, 연애를 막연하게 선망하는 청춘의 사내꼭지를 고려해서 쓴 것은 아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성격이 모두 다르고, 전개되는 상황과 환경도 모두가 다른데 누가 누구에게 책 몇 권으로 무슨 도움을 줄 것인가 말이다.

어쨌든 서울에서의 양말장사 실패를 끝으로 일시 귀향한 내 나이 열여섯 살, 그 해의 겨울에서 이듬해 여름까지 약 칠팔 개월은 내 생애 최초로 당하는 잠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었다. 만약에 사촌에서 육촌, 팔촌, 그리고 사돈네팔촌까지의 여동생들이 같은 마을에 오물조물 수도 없이 살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도 느닷없이, 그렇게도 뜬금없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나를 덮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동생들을 원망하랴. 딸들만 잔뜩 낳으신 친척 어른들을 원망하랴. 아니다. 진실만을 말하기로 맹세하고 토설하자면 그 무렵의 나는 사실 최고의 행복을 구가하고 있었다. 앞뒤좌우 사방이 온통 때까치 같은 여동생들로 병풍을 치다시피 하고 있으니 세상에 남자는 나 혼자뿐인 것 같았고, 가끔은 너무 시끄러워서 귀찮다는 마음이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면 그 시끄러움이 도로 그리워지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천국이 바로 내 주변에 있었던 셈이다.

허공을 나는 새만 봐도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여동생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아마 꼬집어도 보고 싶고 깨물어도 보고 싶은 희귀한 존재였을 것이다. 열두 살 나이에 무단가출을 감행해서 죽지도 않고 어디 크게 다친 데도 없이 돌아온 오빠가 어쩌면 이국풍의 색다른 남자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함께 놀아주기까지 한다. 몇 안 되는 다른 오빠들은 여동생 보기를 무슨 호환마마처럼 여겨서 툭 하면 저만치 떨어져라, 밖에서는 아는 체도 하지 말라 등등 온갖 밉상 짓을 다하지만 이 오빠는 다르다. 서울 얘기를 해 달라고 하면 자발자발 잘도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오밤중에 어디로 함께 놀러가자고 해도 크게 싫다는 내색이 없이 따라가 주니 이것이야, 바로 이것이라니까 하는 뭐 그런 심사이기도 했을 것이다.

 

청매
청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오밤중이란 것은 이것저것 따져볼 필요도 없이 신비한 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어디서 뭔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형태도 소리도 없는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서 뒷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기도 한 그 시간을 여동생들은 무서워, 무서워, 하면서도 어느 순간 꺄르륵, 일제히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고, 그 좋은 시간을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야 있겠느냐는 듯이 밤만 되면 부모님 몰래 집을 나와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한 곳에 모여 누구는 뜨개질을 하고 누구는 수를 놓고, 또 누구와 누구는 화투를 치면서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머리가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어디의 누가 연애를 하다가 부모님에게 들켜서 머리채가 싹둑 잘렸다는 얘기부터 십 리도 훨씬 떨어진 어떤 마을의 누가 오늘 밤 혼자서 집을 본다는 얘기에 이르기까지, 아직은 집에 전화도 없던 시절이건만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다만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날 밤의 사건도 여동생들의 그런 놀라운 정보력 플러스 넘치는 생명력이 빚어낸, 나로서는 아마 죽어서도 부끄러워, 부끄러워 미치겠네 하는 심사로 숨을 곳을 찾아야만 할 희극적이면서도 절망적인 히스토리였다. 설 명절을 보내고 정월 대보름 마을 잔치가 끝난 지도 한참이어서 아버지들이 날마다 지게에 퇴비를 지고 논두렁을 걷던 즈음이었다.

어디에 아주 예쁜 여학생이 있는데 기타를 기막히게 잘 친단다. 그 여학생의 부모님이 그날 밤 외가댁 제사에 참석하느라 집을 비우게 돼서 어린 남동생과 둘이만 있는데 밤새 실컷 놀아보자고 초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서, 당구장과 다방과 탁구장이 늘어서 있는 면소재지 거리를 횡단해서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한 시누대와 소나무 숲을 교대로 통과해야 하는 아주 먼 길이었다.

그 당시 면소재지에는 각종 껄렁한 아마추어 건달들이 수도 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구장과 탁구장과 다방 그리고 이발소와 구멍가게 같은 다중 이용시설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앉아서 호시탐탐 뭔가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낯선 얼굴이 거리에 나타나면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하는 식으로 슬금슬금 나타나서 순식간에 에워싸고 시비를 걸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 오래 전부터 마을 청소년들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다리
다리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하지만 그날 밤은 예외였다. 예외로 하자는 합의가 있어서 예외가 된 것은 아니었다. 조심해야 할 무엇이 거기 어디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안 계신 집에서 신나게 마음껏 놀아볼 수 있다는 구체적인 흥분과 설렘이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몰아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면소재지가 보이는 다리 앞에 왔을 때부터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가능한 한 발소리를 죽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다리 밑에서 잠자던 청둥오리들이 느닷없는 사람 기척에 놀라서 꽤액 꽤액 소리를 질러대며 달아나는 소리에 우리는 털썩 주저앉을 듯이 놀라면서도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고 있었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들 자신이 웃겨서 키득거리면서도 역시 큰소리로 웃어대지는 않을 정도로 면소재지의 악명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알고 있었다. 면소재지는 버스가 다니는 큰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생활하수가 흐르는 까닭에 악취가 진동하는, 까딱 잘못하면 발이 빠질 위험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안전한 뒷길도 있고, 샛길도 있고, 우회로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조심조심, 살금살금, 그런 스스로가 웃겨서 또 낮은 소리로 키득거려대며 악명 높은 면소재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갈 때는 긴장한 까닭으로 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지나갈 수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사정이 완전 달랐다. 긴장은커녕 마음이 풀어질 대로 풀어진 여동생들은 세상이 온통 다 우리 것이라는 듯이 떠들어대며, 웃어대며 보무도 당당하게 면소재지 큰길을 멋대로 아무렇게나 횡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도롱뇽알
도롱뇽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게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선 나부터가 무슨 대마초 같은 것이라도 피워댄 것처럼 멍하고 띵하고 어리버리해서 무엇을 봐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내가 나인지 다른 누구인지 도대체가 모호하기만 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여동생들 또한 그 동네 남학생들과 어울려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고 난 뒤의 흥분과 설렘의 도가니에 빠진 채로 이런저런 품평회를 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생긴 것도 예쁜 애가 기타도 기막히게 잘 친다는 여동생들의 얘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실루엣 자체가 몽환적인 그림 같았다. 여동생들이 우리 오빠라고 소개할 때 얼핏 한 번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눈알이 홱 돌아가 버렸고, 그 뒤로 다시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그녀가 있는 쪽으로는 눈길도 보낼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수건돌리기 놀이를 시작으로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어쩌고 하는 합창과 함께 진행되는 쎄쎄쎄 놀이를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놀이의 하이라이트격인 ‘기타 소리 딩동댕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하고 부르는 그림 같은 그녀의 기타 소리에 맞춰 다함께 일어서서 엉덩이를 돌려대는 놀이로 이어졌다.

유감스럽게도 실컷 놀아본다는 생각은 그냥 우리의 생각일 뿐이었다.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고 있었고, 그림 같은 그녀는 작별의 시간이 왔음을 고하고 있었다. 외가댁에 제사를 모시러 가신 그녀의 부모님이 제사가 끝나는 자정에서 새벽 사이에 돌아오신다고, 그러니 그 안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안을 말끔히 정리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중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처음 기대했던 대로 원도 한도 없이 실컷 놀았다면 아마 심신이 지쳐서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지는 않았겠지만, 마치 뭔가를 하다 만 것처럼, 소풍을 가던 중에 비를 만나 돌아서야 했던 것처럼, 아쉬움과 속상함이 너무 크게 가슴을 점령하고 있었던 까닭에 여동생들은 그야말로 때까치들처럼 떠들어대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그림 같은 그녀의 기타 치는 모습만 죽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면소재지의 악명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그들은 나타났다. 어디서 무슨 휘파람 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흘려듣고 말았다. 휘파람 소리는 점점 확실해져 갔고, 시커멓게 움직이는 것들이 우리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때서야 우리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떠들어대던 여동생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속삭이는 소리로 오빠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고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눈앞이 캄캄해진 나는 덜덜덜 떨기만 했을 뿐 아무 짓도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 윤곽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아마추어 건달들은 자전거 채인 같은 것을 휙휙 돌리면서 휘유, 휘유 하고 야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어느 순간 상상도 해볼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야 느그덜 뭣이냐?”하고 또랑또랑한 소리를 질러대며 앞으로 쓰윽 나서고 있었고, 뒤를 이어서 마치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깡패냐?” “강도냐?” 등등 저마다 한 마디씩 소리를 질러대며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와중의 어느 순간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는 얼른 뛰어, 죽어라고 뛰어. 다리 건너서 만나게 잉?” 하는 것이어서 나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야말로 죽어라고 뛰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그날 밤 여동생들을 정체마저 알 수 없는 건달들에게 통째로 떠넘긴 채 도망을 쳤던 것인데, 아슬아슬하게 다행스럽게도 건달들 중에 하나와 여동생들 가운데 한 명이 그럭저럭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까닭에 별 큰일 없이 끝날 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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