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임 지음/ 문학동네

ⓒ위클리서울/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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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1990년,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글쓰기를 선보이며 '광장으로 가는 길'로 화려하게 등단한 길 위의 작가 함정임이 올해로 등단 삼십 주년을 맞이했다. 신춘문예 다섯 군데 동시 당선이라는 타이틀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던 작가는 그 빛보다 더 밝게, 더 오래 타오르며 쓰기의 삶을 증명해왔다. 함정임에게 쓰기로 이어온 삼십 년의 삶이란 그 시간만큼 떠나온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간 여덟 권의 소설집, 한 편의 중편소설, 네 권의 장편을 써내면서, “쓰기 위해 여행하고, 여행하기 위해 쓰는 호모 비아토르”(우찬제)라는 불림에 값하는 행보를 보여준 함정임이 2015년, 여덟번째 소설집 '저녁식사가 끝난 뒤' 출간 이후 오 년 만에 신작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선보인다.

이번 신작 소설집은 우리가 언제나 작가에게 기대해온 낯섦, 유목민적 상상력, 애도의 글쓰기를 고스란히 이어간다는 점에서 친근한 마음으로 반갑고, 낯선 분량과 독특한 구성,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형식으로 쓰였기에 완전히 새롭다. 이번 소설집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명(地名)이 고스란히 제목으로 쓰인 것일 테다. '영도' '해운대' '용인' '디트로이트' '몽소로'. 이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에 실린 작품 개개의 제목이자 그간 작가 함정임이 거쳐온 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익숙한 지명들에 친밀함을 느끼되 알고 있는 곳으로 예단하지 않기를 부탁드린다. 익숙한 곳과 생경한 곳의 위치를 한순간에 바꿔버리는 작가의 솜씨에, 대극의 것을 단숨에 잇고 중첩하는 장인의 기예에 현기증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번 소설집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함정임에서 함정임으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엔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 꼭 한 명쯤은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이는 한 사람이 단 하나의 정체성일 수 없다는 중요한 테제를 소설적으로 구성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로서, 어머니로서, 딸로서, 누군가의 반려인으로서, 동료로서 자신을 쪼개어 구현하는 글쓰기는 다각도에서 한 사람을 조명하는 작업이 된다. 그러니까 이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배면까지 직시함으로써 자신과 마주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할 터. 독자들은 작가의 조각들을 마주하며 진실-실존의 여정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순간, 순간들'과 '순정의 영역'은 월남 세대, 실향민들로 대표되는 이전 세대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화자는 그것을 옛날이야기쯤으로 흘려듣지 않고, 좋은 귀로 듣고는 생생한 입말로 독자에게 전하는 동시에 ‘실향민’의 감각을 ‘이방인’의 정서로 환원해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킨다. 특히 '순정의 영역'은 단장(récit) 형식으로 구성된 독특한 글쓰기를 선보인다. 이는 이 책의 제사에도 쓰인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를 떠오르게 하는데, 스케치하듯 생동감 있는 특질을 포착해 콜라주처럼 보여주는 구성은 단장 사이사이 도약의 여백을 독자들이 채우는 기쁨을 선사한다. 또한 ‘오순정’ 할머니의 해주 사투리에서 브뤼헐의 회화로 이어지는 유려한 흐름은 마름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기 그지없다.

때로 작가는 부재로서 가장 생생한 현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너무 가까이 있다'는 빈집 관리를 위해 노부부의 집에 당도한 남성이 책상 위에 놓인 이오네스코의 희곡 '의자들'을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김씨로도 곽씨로도 살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을 앞둔 남자는, 문득 낮에 읽었던 “아들은 늘 어머니를 버리죠”라는 「의자들」의 대사를 떠올린다. 이 소설에서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지만, 단 한 줄의 희곡 대사로 어머니는 이 한 편의 소설을 지배하는데 이는 마치 '용인'에서 어린 ‘K’가 아버지를 비석으로 대면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상실감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스페인 여행'은 함정임 소설의 정수를 맛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단편이다. 자전적 색채가 듬뿍 배어나는 이 소설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글이자, 애도를 미리감치 해버린 사람의 글이자, 애도에 실패하면서 결국 성공하는 글이기도 하다. '스페인 여행'은 아니 에르노 소설의 한 장면과 어머니의 부음을 겹쳐놓으며 여성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말함은 물론 작가가 생각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밀도 높은 고민을 담았다. 이를테면 “큰 소리로 외치면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편지를 쓰는 것”, 홀린 듯 몰두하던 일을 중단하고 “대신 레바논 삼나무에게” 가는 행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모두 눈물을 훔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일이 어쩌면 문학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해운대'는 베트남전쟁 때 파병되었던 한국 군인의 손녀로 보이는 소녀 ‘호아’의 이야기로 한 시대를 환기하게 하는 부끄러움과 그것을 넘어 환대로 이어지는 미래를 그려보게 하는 작품이다. 여행하는 사람은 그저 떠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떠나온 사람과 떠나지 못한 사람을 헤아리는 트랜스내셔널한 역사 감각이 동반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을 느껴볼 수 있는 값진 글이다.

이번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도'는 작가생활 삼십 년을 한눈에 펼쳐 보이는 압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자, 지난 삼십 년을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한 작가의 아주 긴 ‘작가의 말’이기도 하다. 짐짓 타인이 되어 자신의 궤적을 좇는 근사한 구성의 '영도'는 실제 함정임 작가가 지난 삼십 년간 발표해온 작품집의 작가의 말이 단서가 되어 한 사람의 생애를 추적해나간다. 지나온 시간과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기 위해 철저한 거리감으로 쓰인 이 소설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마무리하는 글이자, 지난 세월의 글쓰기를 갈무리하는 글이자, 앞으로 새롭게 시작될 작가의 글쓰기의 시작점이 된다.

작가의 조각을 좇으며 함께 걸었던 길고 길었던 애도의 순례길 끝에는 한 세계가 끝나는 곳이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바다가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의 기운, 미지의 기쁨과 슬픔, 싫지 않은 두려움과 설렘. 작가가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떨림은 파도의 운동과도 꼭 닮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까지, 빛에서 그림자까지,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빼곡하게 남은 작가의 발자국 위로, 마침내 나에게서 너에게로 건네는 곡진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애도의 터널 끝에 나타난 새로운 삶의 입구, 그 바다의 초입에 선 한 작가가 이렇게 말을 건넬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손을 잡아줄게요, 당신에게 휴식을 주겠어요”(롤랑 바르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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