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위클리서울/ 창비

무엇으로 흘러온 걸까 페와, 나는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 여기까지 왔어 말 못하는 들판의 나무들, 나뭇잎 하나까지도 견딜 수 없이 무거워서
스위치를 끄고 주저앉아 너의 깊은 눈동자를 향해 돌을 던진다 돌 하나에 사람 하나 돌 하나에 사람 하나,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이름들 너는 눈 속에 저렇게 큰 산을 품고도 그 눈을 감는 법을 모른다.
온몸의 피를 새것으로 갈고 싶어 페와,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몸속 박쥐떼가 흔들린다 빛의 뿌리는 어디쯤 파묻혀 있는지 우리의 갈망은 왜 매번 텅 빈 새장으로 내걸리는지
쓰다듬을수록 참혹하게 엉키는 길 위에서 몸을 벗고 멀어지는 구름들을 바라본다
고개를 내저으며, 페와 그것이 은총이라는 듯 과일들은 담담하게 썩어가고 우리는 다시 끝나지 않는 식탁에 앉아 질문으로 가득한 책을 써내려가야 하겠지
페와, 네가 침묵으로 내내 말할 때
우리 눈을 감기는 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누구의 동의도 받지 않고 번번이 되돌려지는 밤들은

안희연, <페와>,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2년 전 여름, 내가 네팔을 여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길도 사람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땅에서 홀연히 내려 포카라라는 마을로 가는 승합차를 겨우 잡아 다시 몸을 실었다. 그땐 내가 혼자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혼자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일단 넘어야 할 과제들이 너무 많았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혼자라는 것이 두려워지기에 앞서, 포카라에 도착해 내가 마주해야 할 것들에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포카라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 바로 ‘페와’였고 내가 버스 안에서 한참 입으로 곱씹던 시구들은 안희연 시인의 ‘페와’였다.

‘무엇으로 흘러온 걸까 페와’ 이 시의 시작은 내가 ‘페와’를 마주하며 가장 먼저 물어보고 싶었던 물음이었다. 나는 무엇으로 흘러 다니는 것일까. 별다른 계획 없이 낯선 땅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네팔 산골짜기 깊숙이까지 흘러온 데에는 정말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또는 그렇다고 믿고 싶은 걸까. ‘나무’와 ‘나뭇잎’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는 것은 이런 물음들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물음이 물음을 낳고 그것들이 서로의 꼬리를 무는 무한궤도 속에서 나의 말동무인 ‘페와’는 내가 오로지 꿈꾸고 이상 속에 남겨두었던 것에 결코 불과하지 않는다. ‘눈을 감는 법’을 모르는 ‘페와’의 ‘깊은 눈동자’에 하나씩 돌을 던지는 화자의 모습은 물음 속 궤도에 갇힌 나와 반면에 깊고 자유로운 호수의 대비를 보여준다. 시 속에서처럼, 2년 전 나는 무심코 돌을 던지며 ‘페와’를 마냥 미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워한다는 것은 어떨 땐 설렘과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애증이라는 묘한 말이 그렇다. ‘페와’에게 그 묘한 마음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큰 산’을 품고도 ‘눈을 감’지 않기 때문이다. ‘돌’을 던져도 물이 잠시 일렁일 뿐, 그것이 ‘페와’를 바꾸어 놓지도 못한다. ‘스위치’를 끄면 캄캄해진 내 주변도 ‘페와’의 깊은 물속처럼 고요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시 속의 화자는 ‘스위치’를 꺼도 ‘사람’ 혹은 ‘이름들’이 쉬지 않고 일렁이는데, 호수는 잠시 지나면 다시 고요하다. 그 지독한 고요함을 사랑하고도 미워하는 화자는 호수에 ‘돌’을 자꾸 던진다. 그 수많은 ‘돌’들 끝에 나는 ‘페와’에게 결국 무엇을 던졌을까. 남은 건 나 자신 뿐이었을 것이다. 시의 3번째 행을 보면 시인은 ‘페와’에게 던져지고 싶은 마음을 세련되게 풀어낸다. ‘온몸의 피를 새것으로 갈고 싶어 페와’

 

ⓒ위클리서울/pixabay.com

피를 갈지 못해, 항상 같은 피로 살아내야 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늘 새로운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몸속 박쥐떼가 흔들’리고 ‘빛’을 잃고 ‘갈망’이 ‘텅 빈 새장으로 내걸’릴 때, 비로소 시 속의 화자도 시인도 그리고 여행을 다니던 나도 한계에 부딪친다. 그 한계는 무엇에 비롯된 것인지 누군가 묻는다면 ‘페와’는 항상 하던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것은 답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의 영역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 지점에 이르러 이렇게 토로할 수 있다. “필멸자의 한계와 우주의 끝없는 순환” 이러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결론에 도달해야만 누군가는 안희연의 시를 기쁘게 읽는다. 그러나 네팔을 떠도는 과거의 내게 그 결론은 전혀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결론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 ‘페와’를 찾아간 것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침묵’만 할 수 있는 그 호수 앞에서 어떤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그런 사람은 대답이 있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때론 대답이 없어도 그 존재만으로 좋은 무엇이 있다. 힘이 되거나 기쁨이 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냥 좋은 마음뿐이라고 밖에 나타낼 길이 없다. 내가 수십 시간 버스에 몸을 구겨 가며 ‘페와’에 닿은 이유는 이처럼 단지 그것을 좋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페와’ 앞에 나는 스스로 대답한다. ‘끝나지 않는 식탁에 앉아 질문으로 가득한 책을 써내려가야 하겠지’ 나도 화자도 시인도 모두 이미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 대답은 또 다른 질문들이다. ‘페와’가 내 이상과 꿈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지만 나는 그런 ‘페와’에게 실망하진 않았다. 호수는 여전히 내 말동무가 되고 내가 미워할 수 있는 또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의 마지막 행에서 다시 질문을 남겨놓을 수 있다. 안희연의 시는 나의 오랜 여행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팔에서의 이야기까지 끄집어내며 이 시에 대해 길게 써내려간 것은, 안희연 시인이 뭉뚱그려 말한 ‘슬픔’을 쉽게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호히 말하자면, 그 ‘슬픔’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은 존재하지 않고, 나의 설명 역시도 뻔한 실패작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어떤 결론과 대답에 이르는 것보다 가끔 누군가의 마음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한없이 미워하기만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사랑할 수만은 더 없기에, 그것에 지친 우리들은 치이고 치인 감정을 사람이 아닌 무언가에 토로한다. 그것이 꼭 ‘페와’이진 않겠지만 기왕이면 ‘페와’처럼 한없이 따스하며 고요한 것이길 우린 바란다.

그렇다. 우리는 외롭다. 외로워서 ‘페와’를 찾는다. “애초에 우리는 외롭다”며 지껄이는 철학자가 내겐 필요하지 않다. “질문엔 항상 답이 있다”며 나의 물음에 절망만을 가져다주는 선구자와 위인도 역시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2년 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날의 ‘페와’가 내게 줬던 침묵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도 도저히 알지 못하는 내게 나 자신이 괴로울 때, 가끔씩 그 먼 네팔로 돌아가 ‘페와’에게 요즘도 돌을 던진다. 자꾸 던지다보면 널 미워했던 내가 조금은 덜 부끄러울 것 같아서. 호수의 깊은 침묵이 날 감싸 안고 언젠가 심연 속으로 들어가 줄 것만 같아서. 퐁당거리는 소리가 돌 때문인지 여름의 빗소리인지, 힘겨운 봄을 겪는 우리로선 아직 알 길이 없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