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 지음/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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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서 “번역의 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앞으로도 좋은 번역을 해나가야겠다고 하루하루 스스로를 다잡는다”라고 썼다. 번역가 정영목은 저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서 “번역가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외국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국어를 나의 한국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한국어로 구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우리나라의 독자가 먼 나라의 작가를 만나려면 반드시 번역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번역가의 일은 단순히 외국어를 잘하는 것 이상의 고뇌와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하물며 인터넷조차 쉽게 쓸 수 없던 이삼십 년 전에는 고도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리라.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을 탐험하는 ‘번역’의 황홀함과 고단함을 이야기하는 산문집이다. 지은이 김지현은 영미문학 번역가이자 소설가이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필진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단편소설 <로드킬>로 SF어워드를 수상했다. 번역가로서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다. 잔혹 스릴러 '복수해 기억해'부터 조이스 캐롤 오츠의 호러 '흉가', 미국 단편소설의 여왕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선, 세라 워터스의 최신작 '게스트' 등이 그의 손끝에서 우리말로 재탄생했다. 또한 대부분의 작가와 번역가들이 그렇듯, 충실한 독서가이기도 한 그는 어린 시절 읽던 문학 작품에서 만난, 상상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던 음식들과 이에 함축된 문학의 디테일을 고민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생강빵을 먹는 소녀와 진저브레드를 먹는 소녀는 외모도 말투도 성격도 다를 것 같다.” 물론 둘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독자는 같은 듯 다른 두 소녀를 따라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며 ‘독서의 맛’을 즐기면 된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의 각 챕터는 지은이 김지현이 만난 명작 소설의 한 구절로 시작된다. “순식간에 월귤나무 숲에 다다른 호호 아줌마는 양동이를 수풀 밑에 내려놓았습니다.” 링곤베리가 월귤(越橘)로 번역된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를 읽은 지은이는 산앵두나무속에 속하는 링곤베리를 신비로운 ‘귤’로 상상했다고 한다. “나는 바구니에서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를 두 개 꺼내 쌍둥이에게 나눠주었다.” '다락방의 꽃들'을 읽으면서는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가 대체 뭘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땅콩버터와 잼이 발린 식빵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번엔 ‘참치김치볶음밥은 참치와 김치볶음밥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하며 고민을 이어간다. 그러나 이 산문집은 번역을 지적하고 오역을 바로잡는 책은 아니다. 작가이자 번역가로 성장한 지은이는 번역문은 필연적으로 원문의 의미를 잃는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운 오해’들을 되돌아보며 원문에 한발 더 다가간다. 이를테면 '작은 아씨들'에서 에이미가 손님용 만찬으로 준비한 바닷가재 샐러드 이야기가 그렇다. 랍스터라는 멋진 이름으로 더 익숙한 바닷가재는 사실 당시 유럽에서 낚싯밥으로나 쓰이던 식재료였다. 하지만 에이미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최선을 다한 에이미는 우아하고 당당하다. 이처럼 공감이 상상의 원동력이 되고 새로 습득한 지식이 더 큰 감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지은이가 ‘음식’을 주된 키워드로 삼은 까닭을 짐작하게 한다.

책의 차례도 식욕을 돋운다. 식전(食前), 본 식사, 식후(食後) 순에 따라 총 3부로 구성했다. 제1부 ‘빵과 수프’에는 하이디가 그리워한 검은 빵, 소공녀 세라가 양보한 건포도빵 등의 이야기가 소담스럽게 담겼다. 제2부 ‘주요리’에는 워더링 하이츠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차려진 거위 구이를 비롯하여 안나 카레니나가 맛본 플렌스부르크 굴과 함께 서양의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 ‘TV 저녁식사’도 다루어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소개했다. 제3부 ‘디저트와 그 밖의 음식들’에는 빨간 머리 앤이 마신 나무딸기 주스, 오 헨리의 클라레 컵처럼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디저트뿐만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먹은 ‘아주 작은 케이크’처럼 상상의 음식까지 실었다. 음식 이름을 제목으로 한 각 챕터에는 그 음식이 등장한 소설 속 장면을 실어 읽는 맛을 더했다. 챕터 끝에는 최연호 파티시에의 감수를 받아 음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정보를 덧붙였다. 지은이가 섬세하게 배치한 순서를 따라 읽어도 좋고, 좋아하는 음식부터 찾아 음미하듯 읽어도 좋다. 좋아하는 문학 작품이 담긴 챕터를 찾아 다시 한 번 추억에 젖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눈을 즐겁게 하는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는 윤미원 푸드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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