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옛날의 목민관들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어진 정사(政事)를 폈던 내용을 열거하여 뒷날의 목민관들이 본받을 수 있게 편찬한 내용이『목민심서』에는 많습니다. 어진 목민관의 예(例)가 주를 이루지만, 더러는 잘못한 목민관의 예도 들어서 경계의 마음을 지니도록 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잘했던 목민관의 일에서 다산은 감동을 받으며, 그런 훌륭한 목민관들이 백성들을 보살펴주고,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지극정성으로 구제해주었던 일에는 언제나 감동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습니다. 

책의 여러 곳에서 다산은 자신이 상관(上官)으로 모시면서 직접 듣고 보았던 어진 목민관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 바로 유의(柳誼:1734-?)라는 목민관이었습니다. 유의는 목민관으로도 훌륭했지만, 모든 부분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했던 관료로 뒤에는 대사헌(大司憲), 병조참판(兵曹參判)의 벼슬에 오른 고관이었는데, 다산이 천주교 문제로 모함을 받아 승정원 승지(承旨)의 벼슬에서 쫓겨나 충청도 홍주(洪州:지금의 홍성)목 산하에 있던 금정도(金井道) 찰방(察訪)이라는 하급의 벼슬살이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때 찰방은 지금으로 시골의 역장(驛長)과 같은 낮은 벼슬인데, 그 직속상관은 바로 홍주의 목사(牧使)이던 유의였습니다. 유의가 병조참판 때에는 다산은 병조참의로 또 그를 상관으로 모셨습니다. 

때문에 유의에 대한 이야기는 다산이 직접 목격했거나 아니면 직접 유의에게서 들은 이야기여서 정확한 사실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참판 유의가 홍주목사 때의 일이다. 흉년을 만났는데 유리걸식자 5~6명이 읍내에 돌아다녔다. 유의는 그들을 가련하게 여겨 마방(馬房:군청의 뜰에 있었다)에 머물게 하여 죽을 먹이고 불을 때어주었다. 군청의 간부나 아전들이 간하기를, ‘유리걸식자를 이같이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면 그 떼가 앞으로 구름같이 모여들 것이니 누가 이것을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며칠이 안 되어 유리걸식자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사람이 수 십명이었다. 유의는 이들을 모두 수용하고 좌우에서 극력 간해도 듣지 않았다. 내가 홍주에 가서 (다산은 1795년 7월 26일에서 12월 20일까지 금정에서 근무했다) 살펴보니, 석양에 마방에 수용되고 있는 유리걸식자들이 밖에 나와 햇볕을 쬐고 있었다. 유의가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해주고는, ‘유리걸식자는 그 수효가 한도가 있는 것인데, 구름같이 모여든다고 미리 말하는 것은 모두 착한 일을 가로막는 일이다.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우선 받아들일 것이요, 힘이 이에 다되면 보내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나?’라고 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그 말에 마음으로 감복하고 있다.’ (余至今心服其言)” (「設施」)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내가 지금까지 그 말에 마음으로 감복하고 있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가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그럴 때 받는 은혜는 더욱 감복하기 마련인데, 배고프고 추워서 헤매는 유리걸식자들을 보살펴주던 목민관의 훌륭한 정사에 다산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요즘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어려움에 처한 환자들에게 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철저하게 대처해주는 점을 보고 들으면서, 옛날의 어진 목민관들이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베풀던 온정을 생각나게 합니다. 서로 돕고 힘을 합해, 그런 큰 재난을 극복하려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함께 극복해 내야 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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