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그까짓 거
김밥 그까짓 거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0.04.13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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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온 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19 덕택에 개학 연기를 거듭 반복한 아들과 올해 초부터 강제 휴강을 당하고 있는 내가 두문불출하고 집을 지키고 있는 사이 어느 새 계절은 봄을 맞이하고 있다. 그나마 남편과 딸은 외부 출입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은 삼시세끼가 아주 고민이다. 한창 먹성 좋은 아들과 나는 본의 아니게 집 지킴이가 되고 보니 뒤 따라 오는 매 끼니마다 뭘 해먹어야 될지 걱정으로 참 고역이다.

어느 날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김밥을 한 번 말아 보고자 큰마음 먹고 장을 봐 왔다. 무슨 음식을 하던 나는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요리솜씨도 없을뿐더러 뭘 해서 먹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는 무식욕자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밥을 참 좋아한다. 김밥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김밥이라고 하면 환장을 한다. 굳이 무언가를 연관시켜 보자면 어렸을 때 엄마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구조의 부엌바닥에 쪼그려 앉아 빨간 바탕에 화려한 꽃그림이 박혀있는 삼단 찬합에 동글동글한 김밥을 정성스럽게 담아내던 기억이 있다. 김밥은 소풍 가는 날에만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그 날도 누구의 소풍날이었는지 엄마는 선생님 드릴 거라며 김밥을 담고 계셨다. 나는 학교 다닐 적 반장, 부반장 뭐 이런 것들과 꽤나 거리를 두었으므로 미루어 짐작컨대 학년마다 반장에 임명되던 내 동생의 소풍날이 아니었을까. 옛날에도 김밥 안에는 길게 자른 분홍 소시지와 햇병아리 같은 노오란 단무지와 새파란 시금치가 항상 돌돌 말려 있었다. 가끔 엄마는 갈은 소고기를 함께 넣기도 했는데 육류 냄새에 매우 민감한 나는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요즘 나오는 소고기김밥의 원조는 엄마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김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없지만 두 세줄 정도는 거뜬히 해 치우는 먹성을 소유하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김밥을 말아 본 것은 큰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던 때였다. 무려 4대1이라는 어마어마한 추첨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동네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엄마들이 순번대로 돌아가며 한 반의 유아들에게 간식을 준비하는 규칙이 있었다. 워킹맘의 육아에 대한 배려 따위는 태동도 안 하던 시기였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우리 네 식구 단출한 식사 준비에도 매번 어려움을 느끼던 초보 주부가 30인분을 준비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숙제였다. 할 줄 아는 건 없어도 먹을 줄 아는 걸로 시작한 것이 김밥 30줄이었고 대외적으로 우리 식구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내가 한 음식을 먹으라고 내놓는 기회이다 보니 잘해보려는 욕심에 검은 김밥, 뒤집어 말은 누드 김밥, 계란 지단을 입힌 노란 김밥으로 떡 하니 30인분을 해냈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 친분을 쌓게 된 같은 반 학부형들이 나름 팁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는 치킨 집이나 샌드위치 집에 전화해서 종류별로 이것저것해서 30인분이요 하고 주문하면 될 것을 왜 그런 고생을 했냐며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취급을 당하기도 했지만 십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용담처럼 김밥 30줄 말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침 튀기며 자랑하는 나만의 사건이 되었다.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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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을 하고 계절마다 치러지는 행사나 현장학습이 있으니 김밥말기를 멈출 수 없었다. 단조롭던 김밥 속 내용물은 시대에 발맞추고 주변의 입맛도 반영해서 점점 다채로워졌고, 계란 지단과 김밥이 분리되어 따로 놀던 노란 김밥은 프라이팬에 계란을 펴서 익히며 김밥을 부쳐 내듯이 말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꽤나 흥분된 유레카를 외칠 때도 있었다.

요즘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다양한 레시피를 제공받는 시대인 만큼 어느 SNS를 통해서 알게 된 색다른 방법의 김밥을 말아 보려고 한다. 길게만 죽죽 썰어 볶거나 익히거나 하던 속 재료들을 아주 가늘게 채를 썰어서 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계란 지단도 채 썰고 맛살도 채 썰고 어쩌다 보니 시금치도 다져 버렸다. 썰어 놓은 김밥의 단면은 화사한 봄날 흐드러지게 핀 색색들이 봄꽃 마냥 참으로 예쁜 김밥이다. 가끔 비좁은 밥알들의 틈새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 독립을 꿈꾸는 옆구리 터진 김밥은 얼른 나의 차지다. 칼 쥔 놈이 임자니까.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봄 색은 참 따뜻하기도 하다. 가지가지 김밥을 도시락에 담고 보온병에 따뜻한 국물을 담아 그 당시 나이가 한 자리 수였던 아이들과 함께 주말이면 봄을 마중하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아직 추웠지만 봄은 이미 오고도 있었고 매번 그러한 봄은 설렘과 나른함을 데리고 오기도 했고 김밥은 참말로 맛있었다. 열 몇 번의 봄을 맞이하고 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장성해 더 이상 나와 함께 봄 마중을 하려고도 하지 않고 할 시간도 없는 바쁘신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김밥은 맛있다.

올해의 봄은 많이 아프다.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을 만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한 계절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봄 마중을 하기는커녕 봄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를 만큼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날 문득 마스크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봄내음에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벚꽃이 만발한 봄은 벌써 오고 있었고, 신상 김밥이 또 끝내주게 맛있는 것이 막 미안할 지경이다. 내년에는 평안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SNS로 소통하며 알게 된 어느 분의 담벼락에 있던 시 한편 올려 본다. 위로가 될는지… 김밥 그까짓 거 맛없어도 좋고 안 먹어도 되니 그저 하루라도 빨리 전 세계가 평온한 일상을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봄날이 가기 전에 말이다.

 

<봄날은 갔네> - 박남준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 거린다
십리 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느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 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 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 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 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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