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옛날 옛적 촌놈의 연애행각 (5)

모양성 입구
모양성 입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전국적인 규모의 선거는 언제나 재미있다. 최소한 오백 개 이상의 스토리가 뒤엉켜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니 대하도 이런 엄청난 규모의 대하드라마가 없다. 마구 피어나는 마당의 꽃들 사이를 거닐다가 방으로 들어와서 대하드라마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또 마당으로 나가기를 얼마나 며칠이나 했는지 머릿속이 머엉, 한 느낌인데 마침 여론조사 공표금지, 깜깜이선거 기간이 왔다.

뭐냐 이거, 왜 이런 바보 같은 법을 만들어놓은 거야, 어쩌고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론 잘 됐다 싶어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장구경도 할 겸, 영화도 한 편 보자고 집을 나섰건만, 아쉽게도 코로나19가 미워서 극장 문을 닫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돼간단다. 그러니까 지난 한 달여 동안 극장 출입을 내가 한 번도 안 했다는 얘기가 된다. 뭔가 도둑이라도 맞은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화들짝 피어난 모양성의 벚꽃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세월 참 빨리도 잘 간다. 언제 이렇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우리 집 마당에 피어나는 꽃들에 미쳐서 다른 데 피는 다른 꽃들은 생각도 못해봤던 모양이다. 덤으로 한 가지 사실을 새로 알았다. 우리 집 마당에는 벚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는 것을. 없으니 한 그루 사다가 심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벚나무는 생장속도가 빠르고, 덩치도 엄청나게 커서 가정집 마당에 심을만한 나무는 아니다.

흰 바탕에 핑크빛이 살짝 섞인 벚꽃은 멀리서 보자면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요 홀림이다. 나는 어느새 유혹당했고, 홀려들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아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벚꽃에 이끌려 성곽을 거닐다가 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 여기서 기다렸어, 하는 듯이 부끄러운 개인사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놀랐다. 생생하게 놀랐다. 너무 생생해서 피할 수도 없고 밀어낼 수도 없이 나는 그냥 그 시절 속으로 대책없이 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고창여자중고등학교가 모양성 안에 있었던 그 시절, 내 나이 열여섯이던 그 시절에 나는 여기서 무슨 바보짓으로 만인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가.

그러고 보면 부끄러움은 시효도 없고, 새로고침도 안 되는 모양이다. 세월이 겁나게 흘러 내 머리털이 반백이 됐는데도 그것은 열여섯 살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서 얼레리꼴레리 하고 나를 놀려댄다. 도대체 이런 기억은 왜 안 사라지고 남아서 줄기차게 내 인생을 따라다니는 것일까. 컴퓨터는 하드를 몇 차례 지우고 덧씌우기를 되풀이하면 저 유명한 디지털 포렌식으로도 복원이 안 된다지만, 사람의 머릿속은 컴퓨터보다 훨씬 치밀하고 게다가 정직까지 해서 포맷조차도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이즈음에서야 알았다.

“오빠 내일 뭐해?”

 

모양성 공복루
모양성 공복루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 해의 4월, 아직 본격적인 농사철은 안 돼서 어른들도 한가하게 여기저기 천렵이나 다니던 무렵이었다. 수많은 일가친척 여동생들 중에 하나가 우리 집 마당으로 쓱 들어오면서 물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쳐다보는 것도 잠깐,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그날 밤의 치욕적인 부끄러움과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내게는 아직 시퍼렇게 남아 있었다. 여동생들을 소재지의 건달들에게 떠넘기다시피 하고 도망쳐 버린 오빠란 이게 뭐냐.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었고,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어서 그만 차라리 눈알이 빠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날 밤의 사건은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용납이 안 되었다. 아마추어 건달들이 나는 그렇게도 무서웠던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도 여동생들의 안위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해보고 그냥 달아나기에 급급했던 것일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나는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되고, 용서도 안 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여동생 자신들은 그날 바로 그 문제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오빠 왜 그랬어, 하고 따지거나 묻는 녀석이 없었다. 하긴 말이 좋아 여동생이지 나이 차이는 대부분 한 살밖에 안 되고, 나머지 애들은 생일이 조금 늦어서 오빠라고 불러주는 것일 뿐이다. 아마 그래서 나는 더욱더 참혹해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일 우리랑 소풍 가자.”

너무도 뜬금없는 여동생의 제안에 나는 겨우 한 마디 중얼거렸다.

“어디로 뭔 소풍을 가야?”

“벚꽃이 징상스럽게도 이쁘게 폈디야.”

“뭔 벚꽃이 어디서?”

“모양성. 혜수가 그랬다고 복남이가 그랬어.”

“혜수?”

 

성 안에서
성 안에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복남이는 수많은 일가친척 여동생들 중에 하나였지만 혜수란 듣느니 처음이어서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그날 밤 ‘트위스트 춤을 춥시다’ 하는 기타반주를 멋들어지게 연주해서 나를 무한히 혼란스럽게 했던 그녀의 이름이 혜수였다. 그녀가 모양성 안에 있는 여중을 졸업하고 여고에 입학했다는 얘기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는 전체가 모두 골고루 겁나게 가난해서 중학생 이상의 학생은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도 여중생은 한 명도 없었다. 딸들에 대한 어른들의 관점은 너무도 확고해서 자기 이름이나 제대로 읽고 쓸 줄 아는 삼사 학년쯤이면 이제 됐다, 그만 다녀라, 하는 게 유행이요 상식이었다. 가끔은 딸들 자신이 애 업고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다고 그만둬 버리기도 했다.

누구네 집이나 딸들은 해야 할 일이 많은 시절이었다.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행복한 개구쟁이 시절은 언감생심이었다. 여섯 살만 되면 벌써 애를 업고 엄마한테 젖을 먹이러 다녀야 했고, 여덟 살이면 기저귀 정도는 척척 갈아낼 정도의 솜씨가 길러져 있었다. 집집마다 아이가 최소한 삼사 년에 한 명씩은 태어나고 있었고, 어떤 집은 이웃간에 무슨 경쟁이라도 하듯이 연년생으로 태어나고 있었으니 어쩔 것인가.

엄마가 밭에서 김매기를 하다가 애를 낳아도 별다른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난한 살림이었으니 애보기 문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이들 차지가 되어갔다. 우리 집처럼 아들만 줄줄이 있는 집이라면 아들이 애를 업은 채로 공차기 놀이 같은 것을 하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각종 사고를 쳐서 엄마의 우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지만, 딸이 있는 집에서는 그런 사고가 없으니 딸이란 그 집안의 보물이요 살림밑천인 셈이었다.

게다가 딸들은 애만 보는 게 아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애를 등에 업은 채로 집안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다. 열 살이 넘으면 밥을 짓고 반찬도 어지간한 것은 척척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만든 음식을 함지박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새빠지게 일하는 들판의 엄마 아빠에게 내가기까지 한다. 이런 보물 같은 딸을 학교 같은 데나 보내는 방식으로 자원낭비를 할 만한 부모는 최소한 우리 동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혜수처럼 대대로 부자 소리를 들어온 집안의 딸은 딸이 아니라 따님이었고, 그래서 애 보고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 같은 것은 본인이 하고 싶어도 해볼 수가 없다. 그런 집의 따님은 빳빳하게 다림질된 교복을 입고 다니며 학교공부를 하고, 공부에 싫증이 나면 우아하게 그림 그리기를 한다거나 기타 같은 것을 치는 방식으로 교양을 길러야 한다는 의무가 부여돼 있으니, 애 보고 밥 짓고 빨래하는 친구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내심 부러워나 하는 것이다.

 

복원한 관청
복원한 관청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렇게도 귀한 따님 혜수가 우리 동네 살림꾼 복남이를 자기네 학교 주변에 핀 벚꽃구경을 나오라고 초대했단다. 초등학교 때 정이 옴팍 든 이를테면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십리도 훨씬 넘는 길을 복남이 혼자서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그래서 나름대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동네의 몇몇 또래들이 함께 가기로 했는데 거기에 나를 끼워주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왜 나를 끼워주기로 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그런 의문조차도 가져보지를 못했다. 소풍이라는 말에 별 생각도 없이 그냥 따라나선 것뿐이었다. 여동생들이 모종의 의도를 갖고 나를 데려가기로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린 것은 모양성에 도착해서 벚나무 아래를 한참이나 거닐다가 잔디밭에 모여앉아 이런저런 주전부리 거리를 까먹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 과정이 지금 생각해도 사흘은 족히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피식 피식 웃어야만 할 정도로 발칙하고 깜찍했다. 여동생들 중에 한 명이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가 싶은 순간 나도, 나도, 하고 일제히 일어서는가 싶더니 한꺼번에 우르르 그야말로 무슨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것이었다.

무슨 화장실을 단체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것을 물어볼 틈은 없었다. 사실은 무슨 생각을 해보고 어쩔 정신도 없었다. 다들 화장실을 간다고 떠났는데도 그날의 주인공인 혜수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어서, 어리버리 어떻게 두 사람만 남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이미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볼 수도 없었고, 보고자 하는 의욕도 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없었다. 고개를 살짝 들기만 해도 그녀가 보일 텐데 내 고개는 숙여진 채로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나는 다만 떨고나 있을 뿐이었고,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남몰래 헉헉거리고나 있을 뿐이었다. 감옥도 그런 감옥이 없었고,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마디 뱉어내고 말았던가?

 

다람쥐가
다람쥐가 보인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야아 벚꽃이 진짜 벚꽃 같다.”

이 말이 정말로 내 입에서 나왔는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하진 않지만 나중에 들려준 여동생들의 얘기에 따르면 거의 그에 근접한 말이 내 입에서 나왔었다고 여겨진다. 고개조차도 못 들고 푹 숙여버린 주제에 무슨 벚꽃을 어떻게 보고 있었던 것인지는 당연히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혜수는 그때 뭔가 한 마디 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벚꽃이 벚꽃 같제 그럼 뭐 찔레 꽃 같을까.”

나중에 여동생들이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혜수는 그때 그 말 한 마디를 팩 쏘듯이 뱉어내고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일어서서 그대로 쌩쌩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상황을 재구성해보자면 혜수는 고개를 떨군 채 꼼짝도 안 하고 있는 내게서 짜증이 확 났고, 그래서 오늘 소풍 끝, 해버렸다는 얘기였다.

그날 이후 나는 우리 동네에서 아주 유명한 인사가 되어갔다. 여동생들은 나만 보면 “오빠, 오빠, 벚꽃은 진짜 벚꽃 같은 거제 잉?”하는 식의 발언을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해서 나를 수렁으로 빠뜨렸고, 그리고 그 말은 한 다리 건너, 두 다리 건너, 차츰 온 동네로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고 있었고, 급기야는 어른들조차 나만 보면 웃겨죽겠다는 투로 말은 한 마디도 없이 그냥 헤실헤실 웃어대고 있었으니, 나는 이제 싫거나 좋거나 더 이상은 마을에 남아 있을 수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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