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아름다웠던 정치실험을 기억한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정치실험을 기억한다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0.04.28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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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처음 가보는 길목을 들어서며
ⓒ위클리서울/ 왕성국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투표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도 했건만 이번처럼 신나게, 즐겁게, 설레는 마음으로 해본 경험이 내게는 없었다. 언제나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니까 한다는 마음으로 나서곤 했었다. 심지어는 저 유명한 전략적인 투표도 했었고, 출마한 후보 전원이 부적격자라고 외치면서도 그나마, 그나마, 하면서 꿩 대신 닭이라도 찾는 씁쓸한 심정으로 투표장을 들어서곤 했다.

콩 심은 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나온다는 속담도 있건만, 콩을 심었는데도 팥이 나오는 기이한 세상을 우리는 참 많이도 살아왔다. 속고, 또 속으면서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생에서 포기란 곧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만 포기해 버리자고 생각을 하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콩 심은 데서 콩이 나오는 기적 아닌 기적을 보았다. 꿈속에서나 그리던 국회의원 숫자 5분의 3. 물론 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는, 따스한 봄바람 같은 예감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막연한 예감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좀 더 구체성을 띤 예상으로 확대되었고, 예상은 차츰 확신이 되어갔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거의 안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전체가 보이기 마련이다.

첩첩산중 촌구석에서 괭이질이나 하는, 피어나는 작은 꽃들에 열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무지렁이들이 뭘 알겠느냐고? 아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당신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고 내 속이 다 시원스럽다. 십 년도 더 묵은 채증이 싹 다 내려갔당게.”

전라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요즘 이런 얘기를 자주 한다. 그리고 내심 안철수란 이름의 아마추어 정치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깡패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듯이, 정치를 직업으로 수십 년 동안 하면서 돌처럼 굳어져버린 정치꾼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갖는 감정이다. 새정치라는 구호만 요란했을 뿐,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허깨비 같은 것을 들고 와서 사람을 홀렸다는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해도, 이유야 어떻든 꼴 보기 싫은 정치꾼들을 죄다 데리고 나가서 매몰시켜준 공은 오롯이 안철수라는 이름 석 자에 돌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안철수식 아마추어리즘에 홀렸던 후유증 탓인지 어째서인지 이번 총선에서 전라도 정치꾼들이 보여준 행태는 질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 코미디였다. 어떤 이는 전라도 대통령을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케케묵은 지역감정을 들고 나와서 염치도 없이 휘둘렀고, 또 어떤 이는 문제인 대통령과 함께 나란히 찍은 옛날 옛적 사진으로 현수막을 만들어서 도처에 걸어놓는 식의 한심한 철부지 작전으로 관심을 끌어보고자 했지만,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바보천치들이라는 소리나 들었을 뿐이었다. 하긴 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정치수준을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그들이 지역구 관리라는 명분으로 가끔 내려와서 만나는 사람들이란 첫째가 돈 많은 토건업자거나 지주들이고, 그 다음이 각급 기관장이나 언론사 사주들 그리고 무슨무슨 협회의 회장단들이다. 민생을 구호로 내세웠으면서도 민생에는 일도 관심이 없이 그저 백골이 진토가 될 때까지 정치권력을 움켜쥐고 귀족 행세나 하겠다는 욕망을 도저히 숨기지 못하는 그들은 외친다.

전라도 사람들의 정치의식은 전국에서 최고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준이라고 추켜세우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코웃음이 절로 난다. 그들이 주장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정치의식이란 자기들을 알아봐 준다는, 그래서 자기들은 백골이 진토되는 그날까지 정치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오만방자한 심리에서 나온 고마움의 표현일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가 모를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정치수준의 향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전라도에서는 민주당 공천장 하나면 누구라도 당선된다고. 이 또한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안철수가 들고 나온 새정치 구호가 민주당 것이라서 일단 한 번 믿어주었던가? 아니다. 박정희의 공화당 혈통이라면 막대기를 꽂아놔도 무조건 당선시켜 준다는 대구 경북의 정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소망하면서도 정의를 갈망하는 도도한 흐름이 전라도 민초들의 가슴에는 있다. 보라. 아주 좋은 사례 하나가 있다.

전라도에서 국회의원을 몇 번 하다가 좀 더 큰 뜻을 품겠다고 서울로 갔지만 낙선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운이 좋아서인지 능력이 출중해서인지 도로공사인가 뭔가 굉장히 큰 규모의 공기업 수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무슨 헛것을 보았던 것인지 자기네 일가친척들 돈벌이나 시켜준 것으로 유명세를 타고 말았다. 전라도 사람들은 이 뉴스를 접하고 몹시 창피스러워 했지만, 민주당 공관위는 무엇을 근거로 무슨 판단을 내렸던 것인지 그에게 공천장을 던져주었고, 전라도 사람들은 때가 때인지라 조심스럽게,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이심전심으로 그를 낙선거사로 만들어 버렸다.

민주당이 자랑하는 시스템공천은 얼핏 정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 썩 훌륭하진 않다는 점에 전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게 내심 불편한 마음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한 것이 열린민주당이었다. 열린민주당을 만든 핵심 구성원들이 아니라, 그들이 내놓은 인재발굴 프로젝트가 너무도 신선하고 창의적이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큰 존재감이 없던 유승민씨를 일약 대스타로 만들어준 저 유명한 헌법 제1조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갖는 관심이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은 그렇게도 감동적으로 구성돼 있건만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다양한 국민의 대표성을 띤다고 하는 국회부터가 우선 과거의 지배자들이거나 그 후손들이었고, 어쩌다 하나씩 새로운 인물이 들어선다 해도 무슨 고시 출신이거나 대학교수 아니면 장군들 혹은 거대집단의 수장들 일색이었으며, 심지어는 직능 단체나 소외 계층을 발굴한다는 비례대표조차도 그 모양 그 꼴로 명망가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명망가란 명망가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기 마련이다. 피부에 쏙쏙 와 닿는 생활정치를 기대하기는 처음부터 난망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아프게 꼬집어서 말하자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 보았으니 국회의원도 하면 잘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기대조차도 일반 국민들이 아닌 소수의 전략가들이 정략적으로 선택해서 갖는다.

국회의원이란 일단 법을 만드는 사람이고, 법이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부딪치는 각종 문제들을 개선 내지 규제하는 게 주된 목적인데 전략적으로 선발된 명망가들이 그런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문제가 터진 뒤에서야 부랴부랴 무엇을 만든다고 하니 그게 제대로 될 리 없다.

우리는 그런 소극적인 국회의원이 아닌 적극적인 국회의원을 원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하는 투표가 아닌, 적극적으로 열광하는 투표를 하고 싶었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투표이고 보니 국회의원에 대한 기대도 희망도 없다. 이게 뭐란 말이냐.

엄밀히 따지고 보면 국회의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국회의원 후보가 문제였다. 후보가 그렇고그런 인물들 일색이다 보니 유권자의 선택이 제약된다. 선택이 제한된 투표를 마지못해 어쩔 수 없다는 심사로 했으니 관심의 폭도 자연히 줄어서 이내 잊어버린다. 내가 뽑은 국회의원을 내가 잊어버린다니 이게 뭐란 말이냐.

그렇다면 후보를 아예 우리들 스스로 찾아내면 어떨까. 그것을 아마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걸 게다. 아직 누구도 구체적인 언급은 안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막연하나마 기왕의 투표 방식이 아닌 다른 투표 방식을 원하고 있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열린민주당이었고, 여기서 나온 것이 이른바 열린공천이었다.

자, 전국 각처의 유권자들이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인물을 중앙당에 천거한다. 중앙당은 천거된 인물들을 취합에서 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문제될 소지를 안고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검증한 다음 순위 투표에 부친다. 이렇게 해서 괄목할 만한 아픔과 슬픔과 고통의 강을 건너왔고 지금도 건너고 있는 중인 전대미문의 인물들이 발굴되었다.

 

열린민주당 당선인 기자회견
열린민주당 당선인 기자회견 ⓒ위클리서울/ 왕성국 기자

인물 하나, 대기업에 전자제품 부속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이 있었다. 직원규모 백오십 명의 이 업체가 대기업에 납품하는 부품 가격은 한 개당 삼백오십 원이었다. 삼백오십 원이던 납품 가격은 일 년 뒤에 이백 원으로 떨어지고, 다시 또 일 년 뒤에는 백 원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팔십 원으로까지 떨어졌을 때, 이 중소기업은 폐업신고를 해야만 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울분을 토한 노무사가 있었다. 이 노무사는 처음부터 노무사를 직업으로 택했던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입사에서 노조활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법을 몰라 피해를 당하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노무관련 공부를 새로 시작해서 노무사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었다. 노무사 자격으로 노동자와 사측을 왕래하다 보니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대한민국의 중소기업은 왜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허덕이다가 결국은 망해 가는가 하는 문제.

인물 둘, 대한민국에서 대학교수는 언제라도 정무직 공무원에 임명될 수 있고, 선출직 공무원에 출마할 수도 있으며, 선거운동도 가능하지만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사표를 내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안 된다. 왜 그럴까.

대학의 학생들은 대부분 성인들이라서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초,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미성년자 중심이고 드러나지 않는 문제 또한 엄청나게 많다. 왜 그럴까.

초,중,고등학교의 문제점들을 붙잡고 삼십 년 이상을 고심해 온 사람이 있다. 대개의 평교사들은 십 년 남짓 근무하고 나면 교육행정 같은 대학원 과정을 밟은 다음 교감이나 교장을 꿈꾸지만 그는 일편단심 평교사 자리에서 문제점들을 들여다보았다. 높은 자리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은밀한 것들이 낮은 자리에서는 너무도 확연하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문제점들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지위가 너무 낮은 탓에 번번이 묵살되었다.

인물 셋, 대한민국은 토지가 그리 많지도 않건만 해마다 버려지는 농산물이 엄청나게 많다. 애써 가꾼 농산물을 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폐기처분되는 장면을 보면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원망하며 대안을 모색해 온 사람. 그의 문제의식은 아마도 머지않아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어찌 이런 사람들뿐이랴. 숨은 보석 같은 사람들이 전국방방곡곡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 총선 과정을 통해 알았다. 그런 보석 같은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가서 활약해 주기를 우리는 소망했지만, 소망은 소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실망할까. 아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믿음이 있는데 무슨 할 일이 그리도 없다고 실망을 하랴.

그러면서도 사족 하나는 붙이고 싶다. 열린민주당의 열린공천을 안철수의 국민당과 등가로 파악하며 맹비난을 퍼부었던 김홍걸씨의 세계를 보는 깊이와 폭이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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