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엔 반 룬 지음/ 박종주 옮김/ 창비

ⓒ위클리서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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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서점의 서가를 거닐다보면 지혜를 선사한다는 책들은 대개 죽은 남성 철학자의 의견으로 채워져 있다. 만약 살아 있는 여성들이 일상의 문제에 도전한다면 그 책은 무엇을 말하게 될까? 줄리아 크리스떼바부터 로지 브라이도티까지, 동시대 여성 사상가들에게 사랑, 놀이, 일, 두려움, 경이, 우정이라는 여섯가지 주제를 질문한 줄리엔 반 룬의 철학 에세이 '생각하는 여자: 일상에 도전하는 철학을 위하여'가 출간됐다.

저자 줄리엔 반 룬(Julienne van Loon)은 호주의 저명한 문예창작 교수이자 오스트리안/보겔문학상, 그리피스리뷰 중편소설상 등을 수상한 작가다. 동시에 가정폭력의 희생자이자 싱글맘이다. 우울증을 앓던 친구가 살해당한 이후 ‘남겨진 사람’이고, 자본주의 논리가 만연한 일터에서 제 몫을 다하려 노력하는 여성노동자다. 반 룬은 삶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여성 사상가들의 집을 찾아가 그들을 직접 인터뷰한다. 인정받는 지식인이지만 출산과 육아, 성차별로 인한 평가절하와 잦은 이직, 친구와의 이별 등 그녀들 역시 여성이 겪는 일상의 문제에 부딪혀왔다는 고백을 듣는다.

반 룬은 이들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개인사와 철학적 사유를 쉽고 성찰적인 문체로 엮어냈다. ‘삶을 위한 생각’(Ideas for Living)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기획은 여성의 삶을 고양하는 실천적인 접근으로 2016년 호주예술위원회의 공식후원을 받았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자 저자의 논픽션 데뷔작으로 호주 최고의 작품을 가리는 2020 빅토리안 프리미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에서 격찬(Highly Commended)리스트에 올랐다. 여성이라서, 소수자라서 삶이 불편한 독자들이라면 일상에 도전하는 사유와 생생한 지적 대화로 가득한 이 책을 통해 삶을 자극하고 용기를 주는 철학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여성들, 특히 크리스떼바나 브라이도티, 홈스트롬 역시 여성학이나 철학 분야에서는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상가들이지만 대중에게는 아직 낯설다. 저자는 그 이유를 해명하는 대신 담담한 어조로 이 여성들이 겪은 일을 전한다. 아무리 뛰어난 지적 성과를 거두어도 돌아온 것은 ‘제일 예쁜 대학원생’(마리나 워너)이라는 외모평가였고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감내하며 연구에 매진했지만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보수적인 학계가 그녀를 거부했다(낸시 홈스트롬). 각고의 노력 끝에 철학계의 거장이 되자 ‘공산당의 간첩’이라는 음모론에 휩싸였으며(줄리아 크리스떼바) 평생을 반핵운동에 힘썼지만 ‘할머니’라는 조롱조의 호칭에 간단히 폄하당했다(헬렌 캘디콧). 젠더 불평등으로 인한 평가절하와 차별이 일상인 사회에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있는 힘껏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다행히 이 여성들은 여전히 같은 시공간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전하는 내밀한 이야기와 철학적 사유는 차별당한 과거와 헤쳐온 고난을 넘어서 그 어떤 ‘죽은 백인 남성 철학자들’의 목소리보다 생생하고 친밀하게 다가온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겪는 일상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만의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독자들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어줄 후원자 같은 책이자 일상에 도전하는 여성들의 사유를 오롯이 공표하는 보기 드문 철학 에세이다.

저자는 여섯명의 걸출한 지식인들(로라 키프니스, 시리 허스트베트, 줄리아 크리스떼바, 낸시 홈스트롬, 마리나 워너, 로지 브라이도티)과 두명의 사회운동가들(로지 배티, 헬렌 캘디콧)을 직접 방문해 인터뷰했고 부득이한 이유로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메일을 주고받으며 이 책을 썼다.

‘생각하는 여자’들이 직접 살아낸 삶의 철학을 성실하게 전하는 이 책은 앞으로 기억해야 할 여성 사상가들의 이름을 새로이 제안하고 다정하고 풍성한 사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책이 말하는 철학은 권위있고 유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받아적으며 그 사상을 학습하는 강단 철학이 아니다. 관 속에 묻힌 철학자를 꺼내어 과연 이런 뜻이었냐고 해석을 다투는 훈고학적 철학도 아니다.

걸출한 사상가들의 말을 인용한 문장과 그들을 만나러 가는 문장, 그리고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에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머뭇거리는 문장들이 뒤섞이지만 엄밀한 논증이나 거창한 결론이 앞서는 철학은 더욱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서로를 찾아가고 대화하는 가운데 시끌벅적하게 벌어지는 일로서의 철학, 삶이 불편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불편을 토로하고 함께 고민하는 철학이다. 여럿의 말과 생각이 한데 모여 서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를테면 여성과 소수자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생각하기’라는 하나의 역동적인 운동을 보여주는 철학이다.

저자는 거침없이 생각하고 활동하며 고유한 삶을 살아낸 여성들과 대화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다양한 철학적 아이디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스스로 ‘좋은 삶’(good life)의 의미를 탐색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 때로는 쉬운 동의를 거부해보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이가 제출한 생각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려보아도 좋다. 그렇게 맞서고,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이 책에 담긴 깊고 생생한 일상의 철학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가벼이 적용해보자. 자연히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철학, 우리에게 가장 힘이 되는 철학이 선사하는 생각의 기쁨과 건강한 삶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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