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지음/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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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철학자 김영민은 인문학 하는 것의 핵심으로 오랫동안 글쓰기에 천착해왔다. 인문학은 읽고 쓰는 것이되, 쓰기가 없다면 그 앎은 한 번도 수면 위에 떠오르지 못한 채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책 읽고 공부하는 이들은 쓰기를 지속하면서, 하나의 색깔로 수렴되지 않는 복잡한 삶을 어떻게 담아낼까를 고심해야 한다. 이는 학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 분야 논문이 아니라면, 삶을 말끔히 도려낸 글은 있을 수 없다.

이 책은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글쓰기로 자기 삶을 어떻게 가루로 만들지 않고 결핍을 채워나가며 욕망을 증폭시킬 수 있는가를 논한다. 글쓰기는 삶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그 활동은 자신을 확인하며 자신이 갇힌 타율의 굴레를 벗겨내고 삶을 구성하면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그러려면 글은 조그만 분량, 한 가지 논의로 정돈되기보다 복잡하고 무한한 글쓰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곧 잡된 글쓰기인데, 이로써 글쓰기를 억압했던 현실에 대한 가장 지속적인 저항을 펼칠 수 있다.

사실 글을 쓰는 자라면 누구나 삶의 ‘깊이’와 ‘성숙’을 생각해볼 것이다. 특히 성숙은 삶에서 맞닥뜨리는 재난을 요모조모 피하면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상수常數로 주어지며, 성숙은 재난 앞에서 무너져가는 격格, 쓰러져가는 멋에 의해 그 비범한 속내를 드러낸다. 특히 슬픔을 어떻게 다스리는가가 성숙과 미성숙을 가름하는 잣대가 될 텐데, 글로써 이를 담아 성숙을 이뤄내는 이들을 우리는 동시대의 학술 논문에서는 보기 힘들고 대개 문학에서 발견하게 된다. 정말로 논문은 삶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논문 쓰기의 역사를 제대로 고찰하고 뜯어고쳐야 한다. 근대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의 글쓰기를 절대 무기처럼 여겨온 논문 작성을 한국사회는 아무런 비판 없이 지난 수십 년간 답습해오고 있다. 사실 10명 내외로 읽는 논문의 무용성에 대해서는 지칠 정도로 여러 차례 지적이 있었다. 변명으로 전문가들끼리의 논의, 학문성의 틀을 갖춘 글쓰기를 내놓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다. 전문성이 1년에 한두 편의 논문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들은 언제 ‘글짓기’ 수준을 벗어나 진정한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읽히지 않는 인문학의 논문이란 사실 존재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논문 쓰기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원전중심주의다. 원전만을 깍듯이 모시는 문화는 자기 집을 제대로 못 짓고 있는 형국에 빗댈 수 있다. 구걸만 하는 학문을 학문이라 할 수 없으며, 원전 바깥의 세상도 믿을 만하고 살 만하다는 것을 학자들은 용기와 성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 용기와 성숙은 바로 삶과 분리되지 않는 글쓰기에서 비롯될 것이고, 삶은 이런 글쓰기로 인해 상승작용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글쓰기와 관련된 저자의 오래전 논의들을 함께 묶어 복간하면서 지금의 현실에서 이 논의들이 여전히 유효함을 펼쳐 보인다. 우리가 쉽게 목격하듯이, 인간과 세상과 학계가 개선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며, 당대에 그런 일을 보게 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절대다수의 학자는 읽히는 글을 쓰기를 거의 포기한 듯하고 그런 역량을 기르지 못한 채 학문의 생을 마감하고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삶도 학문도 다 제것으로 만들지 못한 학자는 과연 소용 가치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래도 어쨌든 글쓰기는 비관의 작업이 아니고, 이 책 역시 삶의 진리가 아닌 여러 일리一理들을 드러내려는 것이 목적이므로, 독자 각자가 자신의 일리를 찾아나가는 여정에서 이 두터운 책은 방향타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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