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을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킹콩을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 김양미 기자
  • 승인 2020.05.04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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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영화 ‘킹콩을 들다’ 포스터
ⓒ위클리서울/ 영화 ‘킹콩을 들다’ 포스터

오랜만에 옛날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박건영 감독의 2009년 영화 ‘킹콩을 들다’.

웬만해선 예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는 성격이 아니지만 요즘은 가끔 레트로 감성이 돋을 때가 있다. 아무래도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충족되지 않는 그런 촌스런 느낌이 그리워지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영화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88올림픽 역도 동메달리스트였던 이지봉(이범수 분)은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시골 중학교 역도부 교사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역도를 배우겠다고 모여든 소녀들을 만난다. 낫질로 다져진 튼튼한 어깨와 통짜 허리를 타고난 영자(조안 분), 교회 오빠를 짝사랑하는 뚱보 현정(전보미 분),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가 FBI가 되겠다는 모범생 수옥(이슬비 분), 아픈 엄마를 위해 역도선수로 성공하고 싶다는 효녀 여순(최희서 분), 엉덩이 라인이 드러난 역도 유니폼에 필이 꽂힌 사차원 소녀 민희(이윤회 분).

스스로를 인생의 실패자라 여기며 자학의 시간을 살고 있던 이지봉은 배를 쫄쫄 굶어가면서까지 꿋꿋하게 살아보려는 영자를 보며 자신도 누군가에게 힘이 돼주고 싶어진다. 갈 길은 멀고 할 수 있는 거라야 역기 대신 대나무를 들어 올리며 역도를 가르쳐야 하는 현실이지만 아이들은 선생님 말이라면 껌벅 죽을 만큼 믿고 따르며 묵묵히 연습을 해나간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산에 올라 첫 수업을 하는 장면인데 대나무를 잡고 엉거주춤 서있는 아이들에게 이지봉 선생이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이렇게 말한다.

“자 모두 똥 누는 폼으로 앉아 본다. 엉덩이 쑥 빼고. 아니 더 빼라고 더!!”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바로 이 장면부터 서서히 가슴이 덥혀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남자 선생님 앞에서 중학교 소녀들이 똥 누는 폼으로 허옇게 허리가 나올 정도로 엉덩이를 있는 힘껏 뒤로 빼고 있는 그 모습. 한참 예민할 나이의 여자 아이들에게 이건 몹시 수치스러운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똥폼을 해야만 역기를 들어 올릴 수 있다. 허벅지는 알탕 속의 명태알처럼 근육질로 땡땡하게 부풀어 오르고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인 가녀린 팔을 나날이 무쇠팔뚝이 되어 가련만 왜 이 아이들은 이런 운동을 하고 싶다고 모여든 것일까.

 

ⓒ위클리서울/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위클리서울/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요즘은 시대가 달라져서 체육 특기생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저 때만 해도 대부분 돈 없는 집 아이들이 운동을 했다.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면 가난한 집을 우뚝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고향의 자랑스러운 건아가 되어 부모님께 최고의 효도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생 연금 타가면서 편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수치심과 괴로움도 달게 견뎌냈다. 물 밖에서는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지만 물 속에서는 숨을 참아야 살 수 있듯이. 물 밖에 나와 마음껏 숨 쉬고 살려면 죽을 똥 살 똥 숨을 참고 견뎌야 했다. 그랬던 시절이었다. 코치 선생에게 뺨을 맞고 발로 차이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오색찬란한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아도 집에 가서 일러바칠 수도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게 그 바닥의 생리였다. 이지봉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대는 무식하게 때리고 욕하고 자존심을 자근자근 밟아가며 운동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판을 쳤다. 왜? 힘없고 가난하니까. 자기 말이 곧 법이니까. 말 안 들으면 특기생으로 뽑히지도 못 했고 지원금도 못 받고 올림픽도 못 나가니까 어쩔 수 없었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바벨을 바닥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머리 위까지 죽을 힘 다해 들어 올려야 했다. 내 몸이 망가지면 버려질 걸 뻔히 알면서도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말이다.

......

이 영화에서 ‘똥 누는 폼’ 다음으로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던 장면은, 교육감(변희봉 분)이 시찰을 나왔다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지봉에게 다가가 아빠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날리는 장면이다.

 

ⓒ위클리서울/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이런 말이 있어요, 이 선생. 스승은 제자의 영혼까지 영향을 미쳐요. 말하자면 아무도 그 영향을 알 수 없다 이 말이지(변희봉표 미소). 좋은 영향…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배움을 주는 사람들을 흔히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같은 뜻이라도 ‘스승님’이라는 말로 불러드릴 만한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하지만 제자의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생님이 과연 얼마나 될까. 교육감의 말처럼, 좋은 스승이 제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 끝을 헤아리기 힘들다. 인생 전체를 바꿔 놓을 수도 있는 일이고 세상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 그만큼 대단한 일이다.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을 잠시 되돌아본다. 나에게도 스승이 있었던가. 학창시절에 나를 가르쳤던 모든 선생님께 정말 죄송하지만 스승이라고 불러드릴 만한 선생님을 나는 만나보지 못 했다. 초등학교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반에 ‘만두’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아이들이 그냥 ‘만두’라고 불렀다. 빡빡 머리에 옷에는 때가 꼬질꼬질하고 준비물을 하나도 챙겨오지 않아 선생님께 맨날 두드려 맞던 아이였다. 한번은 수업 중에 학부모 한 분이 찾아 오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잠시 자습을 하라고 시켜놓고 복도로 나갔다. 만두가 교실 창문을 빼꼼 열고 복도를 엿보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은 그 학부모가 돌아가자마자 교실로 들어와 만두를 패기 시작했다. 무섭게 때렸다. 뺨이 부풀어 올라 옆구리 터진 만두 같았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또 때렸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만약 그 아이가 잘 사는 집 아이였다면 그렇게 때릴 수 있었을까.

이런 일은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있었다. 물론, 좋은 선생님들도 계셨지만 내 인생에 ‘참 스승’이라고 불러드릴 정도의 사람은 없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 부잣집 아이, 학교에 영향력 있는 집안의 아이, 학교의 이름을 빛낼만한 특기를 가진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 가난한 아이, 학교에 영향력 1도 없는 집안의 아이, 학교의 이름에 먹칠할만한 일을 하고 다니는 아이들 편에 서서 감싸주고 편들어 주는 선생님을 본 기억은… 딱히 나지 않는다.

 

ⓒ위클리서울/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위클리서울/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 싼 환경으로 판단 받거나 대접 받아서는 안 된다. 아이들을 대할 때 그들이 가진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아름다운 노래일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고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역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만이 승자는 아니다. 들어 올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매순간 용쓰며 살고 있다. 때문에 세상이라는 차갑고 모진 시합장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내려온다 할지라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이지봉 선생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아이들은 눈물을 쓱쓱 닦고 다시 힘을 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킹콩을 들다’. 이런 좋은 영화 한 편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은, 인생에서 ‘내 편이 되어준 선생님 한 분’일지도 모른다. 학교는 대학을 보내기 위해 존재하는 학원이 아니며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입시강사가 아니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라는 김구 선생님의 말처럼, 힘들고 외로운 아이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그 한 사람의 킹콩이 지금 우리아이들에겐 ‘찐(진짜)’ 필요한 것이다.

........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먼저,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

<헬렌 켈러>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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