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동시집/ 신성희 그림/ 창비

ⓒ위클리서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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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시집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등을 통해 40여년 간 정갈한 작품 활동을 펼쳐 온 이상국 시인의 첫 동시집이 출간됐다. 하루 종일 산과 들을 쏘다니는 소년 화자의 일상을 통해 시인 특유의 자연 친화적 서정이 어린이의 눈높이로 경쾌하게 생동한다. 실컷 놀다 해 질 녘 돌아온 아이의 몸에서처럼, 작품 한 편 한 편마다 풀과 바람의 냄새가 묻어나는 동시집이다.

이상국 시인의 동시에서 어린이는 나무, 곤충, 해, 별 등이 자리한 길 위에 서 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자유로이 거닐며 바깥세상을 활보하는 어린이는 책을 보는 대신 울타리 아래 돼지감자 꽃을 들여다보고(「뚱딴지」), 만화 영화의 다음 에피소드를 확인하는 대신 매일 담벼락에 가 담쟁이가 얼마나 더 자랐나 살펴본다(「담쟁이 나라」). 잠든 뒤 꿈에서까지 새들의 잠자리를 상상하는(「꿈」) 어린이의 노래를 엮은 이 동시집에서는 실컷 놀다 해 질 녘 돌아온 꼬마의 몸에서처럼 풀과 바람의 냄새가 묻어난다.

동시집 속 어린이가 매일 바삐 바깥세상을 뛰어다닌다고 해서 사물들을 얼렁뚱땅 보아 넘길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시인은 어린 화자가 길 위의 관찰자를 넘어 세상의 일원일 수 있도록 시 곳곳에 크고 작은 자리를 내어 준다. 어린이는 길을 걷다 폐지 줍는 할아버지의 리어카에 쓱 다가가 손을 보태고(「언덕길」), 언덕길에서 미끄러진 동네 누나가 부끄럽지 않도록 못 본 체할 줄도 아는(「눈 오는 날」) 오롯한 주체로 움직인다. 더욱 특별한 점은 어린이가 길 위에서 매일 마주하는 생명들을 한없이 세심한 시선으로 살피고, 작은 변화에도 온 마음을 담아 찬사와 응원을 보낸다는 것이다. 강원도의 산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 특유의 그윽한 시상은 동심에 관한 따뜻한 사유와 어우러져 빛을 발한다.

온 세상을 활보하며 관찰하는 어린이의 특별한 시선은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한 사유와 반성을 더하며 더욱 귀한 시적 의미를 획득한다. 어린이는 눈길이 닿는 모든 것을 아름답고 궁금하게 여기는 데 그치지 않고, 주변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고 느끼는 힘을 키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상국 시인은 자연의 이치를 나름대로 설명하려 노력하는 단계에 도달한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는 어린 독자들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지식, 습득해야만 하는 지식과 별개로 자기만의 고유한 통찰을 가꿔 나가는 기쁨을 알게 한다.

'땅콩은 방이 두 개다'에서는 동물의 멸종 등 문제 상황을 바라볼 때 그 까닭을 사람에게서 찾고 반성하는 장면이 자주 포착된다. 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아주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일도 어린이의 맑은 눈에는 자꾸만 밟히고 걸려, 자기도 모르게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 동시집의 백미는 화자가 미안한 마음을 느끼는 것에 멈추지 않고 잘못된 상황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대목이다. 교활하고 간사한 이미지를 온통 여우에게 뒤집어씌우니 여우가 우리나라를 떠난 것이라고 꼬집는 「여우야 돌아와」, 사다리나 설계도 없이도 제 몸에서 실을 뽑아 멋진 집을 짓는 거미를 변호하는 「거미집」, 아예 뚱딴지(돼지감자)의 목소리로 “제발 나에 대하여 / 뚱딴지같은 소리 좀 하지 마라”고 화를 내는 「뚱딴지」 등은 읽는 이로 하여금 머쓱한 웃음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이상국의 동시에서는 지나치기 쉬운 존재들을 늘 아름답게 여기며 궁금해하고, 그 관심이 미안한 마음으로 이어지고, 반성과 해결 의지가 다시 커다란 아름다움으로 되돌아온다. 이 둥글고 선한 아름다움의 바퀴는 어린 독자들의 길동무가 되어 오래오래 씩씩하게 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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