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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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몇 년 전 여름. 오산의 한 물류 창고에서 일한 적이 있다.

대안학교 교사를 할 때였는데 여름에 한 달, 겨울에 두 달은 방학동안 쉴 수 있었다. 지금에야 아이들이 다 컸으니 에헤라디야 놀 수 있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눈만 뜨면 돈 들어 갈 곳이 천지라 놀고 앉아 있을 수만 없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기 전에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간 일할 곳을 찾아두었다. 말하자면 단기 알바 같은 거였다. 오산의 물류창고도 방학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시작하게 됐다. 그 일을 선택한 이유는 높은 시급 때문이었다. 어차피 힘들 거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는 일에 내 노동력을 팔고 싶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눈곱만 대충 떼고 수원역으로 가야했다. 파출소 부근에서 통근버스들이 사람들을 실었다. 문제는 비슷한 버스들이 대략 비슷한 곳에서 잠시 섰다가 올라타는 사람들만 후딱 태워 가버린다는 거였다. 그 버스를 놓치면 하루 일당을 공치고, 공치지 않으려면 택시라도 잡아타야 했으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타 물류창고에 도착하면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만큼 넓은 창고로 내려간다. 내가 일하던 곳은 상온창고였다. 즉 상하지 않는 물건들을 받아 분류해서 택배 화물트럭에 실어 보내는 곳이었다. 출근 카드를 찍은 다음 우리는 모두 우렁찬 음악에 맞춰 국민체조를 했다. 몸을 풀어주지 않고 갑자기 무거운 물건들을 들었다가는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체조가 끝나면 정해진 자기 자리로 가서 일을 시작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해가 뜨기 전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상태에서 해가 뜨고 서서히 물류창고가 달궈지면 마치 겨울옷을 껴입고 찜질가마 안에 들어앉은 기분이 된다. 내가 맡은 일은. 쏟아지는 택배들의 바코드를 찍어 구역별로 나눠진 바퀴달린 렉(rack)에 실어야 되는 일이었다. 이걸 아무렇게나 막 쌓는 게 아니라 무거운 건 아래. 가벼운 건 위로 가도록. 그리고 틈이 생기지 않게 테트리스 블록 끼워 넣기처럼 잘해야 한다. 안 그랬다간 다 끌어내려 다시 쌓아야 했다. 오전 내내 어깨가 빠지도록 쉴 새 없이 물건을 나르고 나면 점심시간에 숟가락 들 힘도 없다. 물컵을 들다 툭 떨어트린 적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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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나와 하루종일 강도 높은 노동을 하다보면 잠시 눈붙일 수 있는 시간이 숨 쉬는 시간이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큰아들이 공사장 아르바이트 할 때 신던 신발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드디어 점심시간. 처음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본다. 그리고 나 혼자 쓸쓸히 밥을 먹는다. 어디가도 밉상 소리는 안 듣는다고 자부했던 내가 여기서는 왕따다. 이름을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 물류센터에서 최고 고참으로 보이는 왕언니 쪽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왁자지껄 웃으며 떠든다. 나도 저기 끼고 싶다. 일은 힘들고 마음은 외롭고 시간은 안 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일을 다녔다. 그런데 나와 같이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는다. 일이 너무 빡세니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또 새로 들어오고 또 나가고… 그래서 이곳에선 서로의 이름이나 신상을 묻지 않았던 거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온 것은 일을 시작한 지 2주째 되던 날이었다. 2주를 버틴 나를 눈여겨 본 왕초언니가 점심시간에 드디어 날 불렀다.

“어이. 안경 쓴 너. 여기 와서 먹어.”

눈물이 핑 돌았다. 일이 힘든 건 둘째 치고 2주 동안 말 한 마디 걸어주는 사람 없고 모르는 걸 물어도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정말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왕초언니가 부르자마자 식판을 들고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언니는 말이 별로 없었고 어쩌다 한 마디 할 때도 입을 크게 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사는 곳이 어디냐.”

“네! 수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언니의 앞니빨 두개가 비어있다. 그래서 말 할 때 늘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았었구나…. 지난겨울 방학 때, 두 달 동안 오리공장에서 오리 껍질 벗기는 일을 하러 다녔는데 그곳에서 아저씨 한 분이 밥을 먹고 이쑤시개를 세 개나 챙겨 나오며 말씀하셨다. 없는 사람들은 이빨부터 망가진다고.

그렇게 나는 그날부터 왕초언니와 말을 텄다. 일하는 요령과 물건을 분류하고 쌓는 일을 언니는 나에게 다시 하나하나 가르쳐줬다. 내가 제일 힘들어하던 일, 팔레트 위에 가전제품이나 커다란 물건들을 각에 맞춰 쌓아올리고 랩으로 아래부터 칭칭 감아올리는 일도 언니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자 훨씬 쉬워졌다. 랩 한번 감고나면 세상이 뱅뱅 돌아 대자로 뻗어버릴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쌓아올리고 분류한 렉을 지게차가 씽씽 다니는 물류창고를 가로질러 구역별로 끌어다 놓으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새벽 6시에 일어나 10시간씩 일을 하고 통근버스가 수원역에 날 토해놓으면 밤이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가는 고 짧은 동안에도 나는 코를 골며 잤다. 집에 들어가면 애들이고 뭐고 누울 자리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일 새벽 6시까지는 잘 수 있겠다는 안도감….

방학동안만 일 할 수 있었으므로 나는 한 달을 채우고 그곳을 나왔다. 일이 끝나던 날. 왕언니는 오산의 한 삼겹살집에서 밥과 술을 사주며 잘 가라고 했다. 다신 이런 데 일하러 오지 말라고. 여기서 몇 년 일하고 나니까 이빨이 다 빠졌다고. 먼지 구뎅이에서 맨날 이 짓 하다 보니 폐도 다 상했고 관절 마디마디가 성한 데가 하나 없다고. 남편이 돈만 벌어다줘도 이 짓 안 하며 살았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그곳과 이별했다.

 

새벽에 나와 하루종일 강도 높은 노동을 하다보면 잠시 눈붙일 수 있는 시간이 숨 쉬는 시간이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현장 (YTN뉴스 캡쳐) ⓒ위클리서울

얼마 전. 이천 물류창고에서 불이 났고 사람들이 죽었다.

나처럼, 돈을 벌기 위해 찾아간 곳이었을 거다.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죽었다. 열심히 뼈 빠지게 일하다가 왕언니처럼 이빨도 빠지고 관절이 성한 데가 없는 채로 어이없이 죽었다. 12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이런 식이라면 12년 뒤에도 또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갈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빨부터 망가지고.

나쁜 나라는 가난한 사람부터 망가트린다.

그곳 물류창고에 있었던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였을 수도 있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아들과 딸일 수도 있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썩은 뿌리를 갈아엎지 않고서야 어찌 꽃이 피길 바랄 수 있을까. 죄 없는 목숨이 얼마나 더 희생돼야 우리 사회는 달라질 수 있을까.

.......

꽃상여 타고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궂은 꿈만

꾸고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

숲 사이로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 눈물을

땅 위에 뿌리며,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양성우. 실천문학사 1981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中>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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