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이원익(1547-1634)은 그의 호가 오리(梧里)여서 흔히 오리정승으로 세상에서 일컬었습니다. 1564년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자 영의정 이준경의 사랑을 받았고 1569년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자 서애 유성룡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뒤에 황해도 도사로 부임하자 당시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율곡 이이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의 벼슬살이로 옮기면서 승승장구로 벼슬길이 열렸습니다. 

그때 조선의 조정에는 분당의 조짐이 있어 이준경·유성룡·이이 등은 조금씩 진영논리가 다르던 때인데, 이원익은 파가 다른 모든 진영의 수장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능력을 인정받는 관료로서의 자질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외적인 지방의 목민관으로 근무하면서 가장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인정받았고, 중앙의 중요 관직에 있으면서도 공정하고 청렴한 벼슬살이로 선배나 동료들의 신망을 한 몸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형조참판·대사헌·호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조판서 재직 때에 임진왜란을 맞아 국난 극복에 큰 업적을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1595년 49세에 우의정 겸 4도체철사로 임명되어 왜군을 물리치는 최전방에서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광해군 시절에야 올바른 신하들이 자리를 제대로 지킬 수 없어, 여러 차례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끝내는 영의정 신분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조반정은 이원익의 진영과는 다른 서인이 주도했던 이유로 서인 진영의 인사들이 벼슬을 독점하던 때인데, 뛰어난 재상의 능력을 지닌 이원익은 반대 진영의 추대로 귀양지에서 풀려나, 다시 인조 초년에 영의정으로 추대되어 어수선한 반정 초의 정국을 안정시키는 공적을 이뤄냈습니다.

이원익은 40년 가까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며 5차례의 영의정, 호성공신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진 귀인이었으나, 서울에서 벗어난 시골(금천:지금의 광명시)에 두어 칸의 오막살이 초가집 한 채가 있었을 뿐, 퇴관 뒤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였습니다.

오리정승이 얼마나 위대한 정치가였는가는 먼 뒷날 다산 정약용의 찬양문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나라의 안위가 공에게 달려있었고                      社稷以公爲安危

  백성들의 잘 삶과 못 삶도 공에게 달려있었네            生靈以公爲肥㾪  

  왜구들의 진퇴도 공에게 달려있었고                   寇賊以公爲進退

  나라의 윤리와 도덕이 공에게 의존했었네                  倫綱以公爲頹整

  「故領議政梧里李公畫像贊」

 

‘짐이 국가다.’가 아니라 영의정 이원익이 국가였다는 위대한 찬사를 바친 사람이 다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위인이 되었을까를 다산은 참으로 정확하게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40년의 정승 생활을 했으나 아주 조그마한 체구에 섬약한 얼굴 모습, 꾀죄죄하게 주근깨만 가득한 안면, 독(櫝)에 숨겨놓은 옥처럼 보이지 않게 내공을 몸속에 가득 채운 인물이었기에 어떤 반대파도 그에게는 승복하는 거대한 정치적 역량을 지녔었노라고 다산은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다산은『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잘남과 똑똑함과 뛰어난 능력을 감추고 못나고 모르고 부족한 사람으로만 보여지게 해야만 큰 정치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경구(警句)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위대한 정치가는 비단옷 위에 홑옷을 껴입어 빛남이 드러나지 않게 한다네(君子衣錦而尙褧)”라고 했듯이, 거대 여당으로 변하여 무소불위의 입법 권력을 지닌 국회의원들, 비단옷 위에 엷은 홑옷을 껴입어 잘남과 똑똑함은 가리고, 제발 겸손하고 겸허한 오리정승같은 정치인이기를 서민들은 바란답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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