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위클리 마음돌봄: 다섯 번째 돌봄, 일상 속 작은 온화함에

[위클리서울=구혜리 기자] 아프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음 이전에 질병과 사고를 완전하게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잘 이겨낼 수는 있다. 도리어 이를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의 삶은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온 신경은 아픈 부위에 집중된다. 하물며 감기나 생채기 하나에도 처방을 받거나 적절한 요법을 취하는데 마음에 난 상처에는 유독 무관심하다. 하지만 마음에도 돌봄이 필요하다. 위클리 마음돌봄은 삶에 관한 단편 에세이 모음이다. 과열 경쟁과 불안 사회를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스스로와 사회를 돌아보는 글이다. 글쓴이의 마음의 조각을 엿보는 독자에게도 작은 위로를 전할 수 있길 바란다.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나는 눈이 약하다. 망막이 문제라면 영양제라도 챙겨 먹는 게 도움이 된다던데 내 눈은 까만 눈동자, 각막이 약해서 영양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어느 병원을 가도 같은 말을 듣는다. 건조증이 심해지면 검은 동자의 각막이 벗겨져 누군가 눈을 찌르는 것처럼 아프고, 눈을 바로 뜨지 못할 통증이 따라온다.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아 오랜만에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혼자 집을 나섰다. 가까운 안과를 찾아 샤워도 못하고 밖을 나선 건 생소한 일인데 따뜻해진 봄볕 때문인지 통증이 수그러드는 듯하다. “많이 아팠을 텐데요”하고 의사 선생님 말에, 내 아픔이 공감을 얻는 기분이 들어 또 위로가 된다. 아마 나는 할머니가 되면 정형외과 단골이 되지 않을까.

요즘은 어딜 가든 사람들로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약국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이 기이한 광경이 낯설고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노라면 나도 줄을 서야 하나 충동이 든다. 그 어느 때보다 친절하고 힘찬 약국 사람들. 안과 약을 받으러 약국을 갔다가 마스크 얘기만 왁자지껄 떠들고 나왔다.

“이게, 지금 이탈리아 가면 한 장에 2만 원이 된다고. 오늘 마스크 구매했어요? 미리미리 사두고 부모님, 친구, 애인 챙겨줘야 해요.”

“한창 미세먼지로 시끄러울 때 잔뜩 사둔 마스크가 아직도 남아있거든요.”

“어이구, 그거 참 잘했네, 잘했어.”

약국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집에서 가까운 동물 병원을 들렸다.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미리 인터넷 주문을 챙기지 못한 고양이 사료를 사기 위해. 애용애용 울며 집사를 기다리고 있을 고양이를 집에 홀로 두고 온 미안한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필이면 이전에 다니던 병원은 휴일 공지를 붙이고 문이 닫혀 있다. 다른 동물병원을 찾아 주위를 돌아본다. 주말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편한 복장으로 집 근처를 나온 사람들, 동시에 부지런히 가게 문을 여느라 분주한 소상공인, 여유롭고 분주하다.

“어서오세요.”

무심코 지나친 많은 동네 가게 중 하나를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기운찬 목소리의 젊은 수의사와 그의 반려견 하나, 반려묘 한 마리가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사료를 고르는 데 대학 진학과 취업 준비만큼 신중해지고, 이 사사로운 일에 수의사는 함께 진지했다. 이유 없는 친절을 넘어 처음 보는 낯선 이웃의 환대를 받고 나면 장소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병원을 찾아다닌 걸까, 아님 누군가의 온화한 대화가 필요했던 걸까.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은 길다. 얼른 마지막 장의 결말이 알고 싶은 지루함에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피곤하다. 사실은 그다지 깊지 않은 얄팍한 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얽히고설켜도 결국은 사람 속에서 회복된다. 경쟁과 쟁취의 자유를 얻은 대신 끊임없이 가혹한 성장과 자기 포장으로 스스로를 내몰아야 하는 숙명을 짊어진 현대인에게 일상 속 타인의 이유 없는 친절과 환대는 귀한 경험이 된다.

사소하지만 드문 경험 속에서 타인에 대한 긴장과 경직된 태도를 녹이고 종이에 물감이 번지 듯 여유로움이 옮겨 물든다. 오히려 때때로 이런 경험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시시콜콜 관심과 논쟁을 오가며 나를 잘 보이기 위해 부딪치는 중요한 사람들, 이를테면 가족이나 직장 동료가 아닌 완전한 타인으로부터 찾아온다. 낯선 환대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듯이 충만해지면, 우리는 또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돌린다. 우리 삶은 별 것도 아닌 데서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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