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을 붙잡는 맛에 취하면 독사도 안 무섭다
향을 붙잡는 맛에 취하면 독사도 안 무섭다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0.05.28 0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찻잎을 좀 따자고 산에 올랐다. 속속 날아와서 코에 박히는 찔레 향이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생각나게 하는 이 계절은 차를 만들기에 딱 좋은 시기이다. 찔레꽃이 사그라질 즈음이면 찻잎은 투박해지고 잡을 수 있는 향기도 별 게 없으니 차 만들기에 있어 찔레는 곧 바로미터인 셈이다.

예전에는 차밭이라고, 어엿한 이름도 갖고 있었고 사람도 제법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냥 밀림이다. 온갖 나무와 풀과 넝쿨이 우거져서 어떤 게 차나무인지 구별조차 어렵다. 과거 한때 찻잎 따는 여인들을 태우고 다닌 자동차 길이 멀리서 보면 희미하게, 어렴풋하게, 마치 스케치북에 휙휙 그어놓은 옛 성터 같은 윤곽이 잡히기는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나무와 꽃들과 새들만 있을 뿐 문명의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식물의 왕성한 생명력은 사람 냄새가 사라지면 그 즉시 가동을 시작해서 순식간에 산을 덮어버린다. 번듯한 기와집도 삼 년만 그대로 두면 지붕 꼭대기에서 버들과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좌우사방이 온통 깊은 산속 옹달샘 노래가 절로 나올 것만 같은 빽빽한 숲인 바에야 무슨 말을 덧붙이랴.

으름나무와 등나무와 칡이 어지럽게 엉켜서 맹렬한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의 밀림에 들어서면 그냥 무슨 요정이라도 나올 것만 같아진다. 하지만 감상은 금물이다. 정신 바싹 차리지 않으면 뱀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부지런한 말벌들의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 움직일 때도 발을 수직으로 똑바르게 들었다가 내려놓아야지 안 그러면 금방 넝쿨에 걸려 휘청거리다가 어어, 하는 사이에 달팍 넘어진다. 넘어졌다가 허둥지둥 일어나려고 하면 찔레며 냉감이며 아카시아 등등 온갖 가시들이 소인국의 화살처럼 온 몸에 박혀서 아이고 나 죽네, 소리가 절로 나오기 십상이다. 그때 말벌이라도 요놈 잡았다 하고 날아들기 시작하면, 그러면 끝이다. 차고 뭐고 정나미가 떨어져서 그냥 돌아가고만 싶어진다.

찻잎을 따러 와서 그냥 돌아간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돌아가지 않는 방법이 있다. 즐기는 것이다.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무엇을? 온갖 잡것들을, 가만가만 조용히 움직이면서 손톱 새에 끼어든 가시라도 들여다보듯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노라면 다른 아무 일도 안 생긴다.

 

첫날 첫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첫날 첫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첫날 두단계
첫날 두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식물 중에서도 넝쿨 식물의 살림살이는 주목할 만하다. 대개의 식물은 자기가 난 자리에서 붙박이로 살아가며 후손을 떨어트리거나 날려 보내지만 넝쿨 식물은 동물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다른 나무를 휘휘 감고 올라가서 태양과 대결을 하자고 으스대는가 하면, 앞뒤좌우 사방 어디든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뚫고 들어가서 쭉쭉 뻗어나간다. 뻗어나가다가 촉촉한 느낌의 흙이 몸에 닿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가계를 형성한다.

이 무시무시한 넝쿨 식물의 번식력을 차나무는 견뎌내지 못한다. 성장 속도마저 느린 차나무는 넝쿨 식물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밤낮없이 흔들리다가 픽픽 쓰러지고, 일단 쓰러졌다 하면 저 위대한 에너지원인 태양과의 입맞춤이 불가능해서 푸른 잎이 하얗게 변하도록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차나무가 드문드문 고개를 들고 있으니, 나는 그것을 보물이라고 부른다. 보물이란 당연하게도 그것이 보물임을 알아본 자에게만 보물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물을 취하고자 하는 자는 위험을 위험으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미치광이 기질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를테면 미치광이인 셈이다. 독사를 포함한 온갖 파충류와 말벌이 왱왱거리는 밀림에서 찻잎을 따자고 뛰어든 사람은 사실 한 명도 없다.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들리느니 오직 새소리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가끔은 뱀이 지나가는 것으로 여겨지는 스르륵, 쉭쉭 소리가 들려와서 나를 긴장시킬 뿐이다.

나도 물론 아무런 방어체계 없이 밀림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어지간한 가시 정도는 방어가 가능한 청바지를 입고, 독사가 나타나서 나를 죽이겠다고 이빨을 박아도 박히지 않는 미끌미끌한 고무장화를 무릎 위에까지 올라오게 신고, 긴팔 남방에 잠바까지 껴입었으니 말벌도 아마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덤비지는 못하리라.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해보기 어려운 이런 미친 짓을 왜 하는 것이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기라도 한다면 나는 아마 향이 나를 유혹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맞다. 나를 이토록 미치게 하는 것은 향이다. 쥐스킨트의 향수와는 결이 다르다. 쥐스킨트는 여인의 향수를 얻기 위해 소설 속 주인공으로 하여금 여인을 죽이게도 했다지만 나는 차마, 감히, 거기까지는 꿈도 꾸지 않는다. 나는 다만 찻잎을 어르고 달래고 설득해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향을 내어놓게 할 따름이다.

 

둘쩻날 첫단계
둘쩻날 첫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둘쨋날 두단계
둘쨋날 두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둘쨋날 세단계
둘쨋날 세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단언컨대 찻잎은 기묘한 성질을 지닌 존재이다. 이 녀석들은 만지면 만질수록, 어르고 달래면 어르고 달랠수록, 시달림을 당하면 당할수록 고순도의 향을 뿜어낸다. 그러니까 찻잎의 향기는 내 기억 속에 있으면서 나로 하여금 또 해봐, 또 해봐, 하고 유혹하는 셈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는 향기를 새로 발견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것인 반면 나는 내가 이미 경험한 향기를 못 잊어서 다시 찾아가는 것이니, 살인도 불사하는 쥐스킨트의 광기서린 작업과 나의 죽음도 불사한다는 식의 노동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잘도 흘러서 어느새 하루가 다 끝났다. 그리고 나는 지쳤다. 파김치가 되도록 따낸 찻잎의 양은 얼마나 될까. 하긴 그것을 따져 무엇하랴. 어쨌든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무쇠 가마솥에 쏟아 넣고 한 번, 두 번, 거듭해서 덖어내는 것이라면야 하루도 채 안 돼서 끝낼 수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차는 그런 간단한 물건이 아니다.

끓인 물에 우려내면 푸른색을 띠면서 약간 떫은맛을 내는 녹차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녹차에는 내가 원하는 향이 없고, 색깔도 내가 바라마지 않는 그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색깔, 내가 원하는 향기, 내가 원하는 맛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틀, 길면 사흘 동안 새로운 긴장감으로 새로운 노동을 열심히 해야만 한다.

우선 찻잎을 채반에 얇게 좌악 펼쳐서 이슬과 열기를 가시게 한다. 아침에 딴 찻잎에 묻은 이슬이 아직도 남아 있고, 한낮에 딴 찻잎의 열기가 남아 있는 까닭에 이를테면 중화를 시키는 셈이다. 그 다음에는 한데 모아서 두 손으로 살살 털어준다. 이때 풍기는 냄새는 식물 특유의 풋풋한 냄새일 뿐 향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두어 시간쯤 지나서 다시 손을 대면, 저기 어디 멀리서 바람에 실려 오는 것 같은 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서너 시간쯤 지나서 흔들면, 향은 아까보다 한 단계 높아져 있다. 요런 식으로 가만히 살살 만지고, 흔들고, 한 곳으로 모았다가 다시 살살 털어서 펴놓기를 되풀이하고 있노라면 찻잎은 그때그때 매번 다른 향을 내놓는다. 그것은 마치 이것뿐이야 더는 없어, 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는다. 만족하지도 않는다. 없다고? 이래도 없어? 하는 투로 계속 살살, 가만히, 흔들기를 되풀이하면 그때마다 찻잎은 정말로 이것뿐이야, 하는 듯이 새로운 향을 내놓는다.

 

셋쨋날 첫단계
셋쨋날 첫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셋쩻날 두단계
셋쩻날 두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셋쨋날 세단계
셋쨋날 세단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가끔은 내 귀에 헛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시달림을 당한 찻잎이 나에게 아이고 잠 좀 자자, 잠 좀 자 이놈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함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중단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순도가 높아져 가는 향이 나는 그저 그립기만 하다. 이미 가진 것을 더 갖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아닌 저것을, 저것도 아닌 그것을, 그것조차도 아닌 그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니 그리움 플러스 안타까움에 초조함이랄까, 뭐 그렇다. 그래서 깊은 밤에도, 잠이 들었다가도 정확하게 때를 맞춰서 벌떡 일어난다.

정확하게 때를 맞춘다고 했지만 특별히 무슨 매뉴얼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감이다. 직감이다. 물레를 돌리는 도예가의 손길이 그러하듯, 볼터치를 강하게 할 것이냐 약하게 할 것이냐를 누구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그 순간의 감에 의지해서 결정하는 화가의 손끝이 그러하듯이, 차를 만들 때의 모든 결정은 그 순간순간의 감에 의지해야만 한다.

당연하게도 이때의 감은 그냥 덮어놓고 아무렇게나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햇살과 바람과 습도와 안개 같은 자연현상을 무시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했을 때의 차는 발효가 넘쳐서 신맛이 돌거나 농도가 불투명하거나 쾌하지 못한 냄새를 날리는 등의 불량품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불량품이 아닌, 누가 봐도 좋은 차라고 말해줄 만한 차가 만들어질 때는 마지막 시달림 단계에서 조짐이 느껴진다. 이 또한 향이다. 여태까지 없었던 농숙한 향이 콧속을 간질이는데 그 느낌이 달다. 달콤한 느낌이 온 몸으로 펴져 나간다. 이때의 달콤은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를 거부한다. 아이스크림 류의 달콤은 당연히 아니고, 벌꿀의 달콤도 아니며, 수박에서 얻을 수 있는 신선한 달콤조차도 아니다. 도대체가 나는 어쩌다가 그런 향기 하나 적절하게 묘사할 만은 언어능력도 못 갖게 됐는가 한탄이 나올 지경으로 오묘하다. 그러므로 그냥 이렇게나 말해야 한다. 찻잎을 마지막 단계에서 시달릴 때의 달콤한 향이 나를 까무러치게 한다고.

마지막 단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 죽여주는 향은 꽤 오래 지속된다. 하도 시달려서 풀기가 하나도 없어져 버린, 그야말로 시들시들한 찻잎을 표면이 우둘투둘한 멍석 위에 쏟아놓고 박박 비비는 순간에도 달콤한 향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일차로 다 비빈 찻잎을 보자기에 쏟아서 공기가 안 들어가게 꽁꽁 싸매는 순간에도 향은 방안 가득 넘실거린다.

공기 한 점 없는 보자기 속에서 발효가 되기를 기다리며 한숨 잠을 청하고 있는 순간에도 달달한 향은 역시 내 콧속으로 부지런히 드나든다. 잠결에 맡아지는 이 향은 뭐랄까, 이 판국에 무슨 잠을 자겠다는 것이냐, 일어나라 일어나 인마, 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만 뿌시시 일어나야만 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유감스럽게도 이 죽여주는 달콤한 향은 점점 농도가 약해져 간다. 멍석 위에 펴놓고 비비기를 세 번째 했을 때는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다. 대신 새로운 향이 나를 휘어잡는다. 그것은 뭐랄까, 철이 들어라 이놈아, 언제까지나 그렇게 즉물적으로 단것이나 탐할 테냐, 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고, 그러다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이어서 코를 벌름거려 본다. 그러면 그때 어느 순간 확신이 든다.

 

완성
완성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시음
시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됐다 이거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확신이라고 했지만 확신에 완전히 들어서기까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다. 만약에 느닷없는 천둥번개에 소낙비라도 쏟아진다면, 그러면 확신이고 뭐고 다 날아간다. 그런 재앙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빌어야 한다. 하늘에 빌어야 한다.

다행히 하늘은 맑다. 태양도 의기양양하다. 구름도 없다. 바람도 요란하지 않게 사분사분하다. 이제 들어간다. 마지막 단계로 들어간다. 발효가 다 된 찻잎을 채반에 담아서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에 펴놓고 익히노라면 비로소 기인 한숨 한 자락이 나온다.

마침내 다 익었다. 꼬들꼬들하다. 손을 대면 바삭바삭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조심해야 한다. 가만가만, 살살, 무거움이 하나도 없이 가볍게 깃털이 움직이는 것처럼 만져야 한다. 그리고 물을 끓인다.

우려낸 찻물을 유리잔에 따라본다. 숨이 막힌다. 성공한 것이냐 실패한 것이냐. 설마 실패는 아니겠지? 맞다. 실패 아니다. 성공이다. 찻물이 유리잔을 채울 때의 향기가 내 마음속의 그것이고, 그 색깔이 또한 내 마음속의 그것이다. 고원지대의 승려들이 어깨에 걸치는 가사를 떠올리게 하는 색깔, 그 오묘한 빛, 색깔이 들었는데도 색깔이 없는 것처럼 찻잔의 바닥까지 비치는 맑음, 이것을 위해서 나는 지난 사흘 동안 숨도 못 쉬게 긴장해 있었느니라.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