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주나 캐나다 살기-16회] 굿바이 캔모어2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여행은 살아 보는 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광고 문구이다. 좋아하는 걸 실행하고자 무작정 캐나다로 왔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저 로키 산맥에서 살아 보고, 오로라 보러 다녀오고, 나이아가라 폭포가 보이는 곳에서 일 해보고, 캐나다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 내 꿈은 소박하다. 캐나다에 도착한 순간 다 이룰 수 있는 꿈이 되었으니까. 꿈을 좇는 그 열여섯 번째 이야기.

 

캔모어 도착한 날 찍은 사진. 이 때는 다른 의미로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랐다.
캔모어 도착한 날 찍은 사진. 이 때는 다른 의미로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랐다.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캔모어 떠나는 날 찍은 사진. 다시 돌아가고 싶기에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캔모어 떠나는 날 찍은 사진. 다시 돌아가고 싶기에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다시는 해외 어디에서도 살지 않을거야.’ 2013년 2월,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돌아오며 했던 다짐이다. 누군가 이 말을 들으면 내가 보낸 호주에서의 시간이 최악이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이다. 감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평온하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다시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며 한국을 떠나 해외 어디에서도 살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다.

그런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 때의 다짐을 까맣게 잊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했다. 하지만 실수를 반복한 내 자신에게 참 감사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만나지도, 이렇게 소중한 경험을 하지도, 이렇게 캐나다를 좋아하게 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캐나다가 좋아진 이유는 소중한 경험들 때문인데, 그 소중한 경험들은 좋은 친구들과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렇다. 친구들 때문에 캐나다가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집주인 아저씨 Terry와 집주인 아줌마 Tuk과 함께.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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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웠던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했던 우리집 뒷마당에서.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콰트로 식당. 캐나다의 가족을 만들어 준 너무나 소중한 곳.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처음 이 곳에 정이 가지 않았다. 외로웠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잘 못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서 살다보니 가족들이랑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웠다. 아름다운 걸 혼자 보고, 혼자 누리는 것이 미안해서 더욱 생각났다.

나는 캐나다 아저씨와 태국 아주머니가 부부인 집에서 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나에게 굉장히 친절했다. 캐나다 가정집에서 찾기 힘든 전기밥솥이 있었고(태국 아주머니 덕분이다.), 종종 음식을 나눠줬으며, 조미료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번도 화장실을 비롯한 공동 공간을 청소시킨 적이 없으며(대부분의 쉐어하우스는 당번을 정해서 청소한다) 만나면 언제나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백만불짜리 전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굉장히 저렴한 가격에 살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의 시간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집주인 부부와 나, 이렇게 셋의 시간 속에서 나도 모르게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가족이 필요했다.

 

어느 날 사장님이 “이거 네가 말했던 제일 좋아한다는 라면 맞지?”라면서 불닭볶음면 과자를 사다주었다. 사장님이 라면이라고 하면 과자도 라면처럼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어느 날 사장님이 “이거 네가 말했던 제일 좋아한다는 라면 맞지?”라면서 불닭볶음면 과자를 사다주었다. 사장님이 라면이라고 하면 과자도 라면처럼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주는 기쁨을 알게 해 준 곳. 마침 여동생이 놀러 와서 콰트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부탁할 수 있었다.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그러던 어느 날, 캔모어에 가족이 생겼다. 바로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 사람들이다. 

캐나다 입국 전, 심장 쪽 질병 때문에 치료 받았던 나는 평소에 건강관리에 엄청 신경을 썼다. 매일 5종류의 영양제를 먹었고, 물도 많이 마시고, 술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문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손님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들리기 시작했고, 곧바로 쓰러질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주문을 하던 손님들한테 양해도 구하지 못하고 기어서 주방으로 갔다. “셰…프….”(chef: 요리사) 주방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 나왔고, 나를 의자에 앉혔다. 그 때 갑자기 오른팔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터질듯이 팔과 손이 붓더니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계속 눈물이 났고, 셰프의 전화를 받은 사장님이 달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응급실에 누워있었고, 사장님은 나를 간호하기 위해 곧 마리즈가 올 거라고 했다. 마리즈는 막내 셰프의 부인으로 임신 중이다. 나 때문에 쉬는 날 인데도 불구하고 달려 왔던 사장님은 나 대신 일을 가야했기 때문에 임신 한 마리즈를 부른 것이다. 그렇게 막내 셰프는 마리즈를 내 옆에 앉혀두고 사장님과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몸상태는 금방 호전되었다. 민망할 정도로 멀쩡해졌고, 무리 하지 말고 또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재방문 하라는 의사 소견만 받았다. 퇴원을 하고 나오는데 사장님 남편이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마중 나와 있었다.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새벽이라도 괜찮으니 언제든 전화 하라고 했다. 집에 들어와 또 울었다. 외롭고 혼자인줄만 알았던 캔모어에 가족들이 생긴 거다. 먼 타지에서 아팠는데도 하나도 서럽지 않았다. 

 

떠나는 날 받은 선물. 며칠 전부터 무슨 색 좋아하냐고 물어보더니… 어떻게 이들을 잊을 수 있을까?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캔모어를 떠나는 게 엄청 슬프지는 않았다. 내가 정말 슬펐던 건 콰트로를 떠나는 거다.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캐나다에서 전문의를 만나거나 응급실에 가려면 주치의의 진단서가 있거나,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상태가 심각했다는 의미와 동시에 사장님이 간호사에게 강력하게 말해줬기 때문이다. 엄마 같았다. 사장님 남편은 아빠, 막내 셰프와 부인 마리즈는 오빠랑 새언니, 주방장님은 큰아빠 등등. 다음 날 어제 너무 미안했다며 문자를 보내니 모두 넌 이제 우리 가족이라고, 당연한 거에 고마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자.

가족들과 함께 일을 하는 건 정말 즐거웠다. 내가 혼자 사는 걸 알기에 모두가 나의 식사를 걱정했고, 식사시간에 일부러 음식을 더 만들어서 항상 내가 챙겨갈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항상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마. 그냥 먹어.” 그렇게 지내다가 점점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집에서 엄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과자를 먹는 것처럼, 냉장고에 있는 디저트를 마음껏 꺼내 먹었다. 종종 나를 위한 스페셜 메뉴를 만들어줬고, 주방에는 언제나 먹을거리가 가득했다. 한국인에게 밥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아는 거 같았다. 밥에서 정을 느꼈다.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밥을 먹고, 수다를 떨러 가는 것 같았다. 매니저는 내 영어 선생님이었다. 틀린 문장이 있으면 고쳐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항상 응원해줬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캔모어.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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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트로 식구들과 함께. 왼쪽 위부터 오른쪽 순으로 Wendy, Allan, Welcy, Kit, Norben, Esmo, Ruben, Mariz. ⓒ위클리서울/김준아 기자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네가 일을 잘 해서 그렇겠지”라고 한다. 하지만 난 4개월 동안 일 하면서 접시를 2번, 컵을 2번 깨트렸다. 초반에는 종종 주문 실수도 했다. 해물요리를 주문 받고 주방에 넘길 때 치킨으로 넣은 적도 있고, 애피타이저부터 주문을 넣어야 하는데 메인부터 넣은 적도 있다. 그리고 한번은 생선요리를 서빙 하다가 생선만 똑 떨어뜨렸다. 그런데 단 한번도, 그 누구도 나에게 잘못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괜찮아. 금방 다시 해줄게. 5분만 기다려줘. 안 다쳤어?” 천사들과 일을 하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열심히 하게 되었고, 우리 레스토랑 가족들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솔직히 캔모어를 떠나는 게 엄청 슬프지는 않았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오면 되고, 도시에 가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정말 슬펐던 건 콰트로(우리 레스토랑 이름)를 떠나는 거다. 손님 없을 때 주방에 가서 수다를 떨던 시간도, 일 끝나고 밤 11시에 A&W(캐나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 가서 건전하게 놀던 시간도, 사장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가족의 가족들까지 소개 받은 시간도… 영원히 잊지 못 할 거다. ‘캔모어 안녕이 아니라, 콰트로 안녕. 꼭 다시 놀러 갈 이유를 만들어 줘서 고마워!’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 돌아가고 싶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나는 오늘도 여행길이다. 

 

김준아는...
- 연극배우
- 여행가가 되고 싶은 여행자
- Instagram.com/juna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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