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pixabay.com, 그래픽=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쾅쾅쾅쾅. 김양미씨 계세요? 문 좀 열어 보세요!! 쾅쾅쾅쾅.”

2005년 어느 평범한 날의 오후였다. 나는 다림질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문이 부서져라 쾅쾅 두들겨 댔다. 놀란 나는 뛰어나가 문을 열었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119대원들이었다. 우리 집에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이 들이닥친 걸까. 나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 나는 신림동 산꼭대기에 살고 있었다. 구기동 친정집에서 4년 동안 얹혀살다가 막 분가를 했던 때이기도 했다. 6살, 4살 두 아들을 데리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끼리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때 남편 월급이 90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막상 우리끼리 살아보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 나오긴 했지만 사실 집을 얻을 돈도 없었다. 서울에서 그나마 싼 곳이라서 벼룩시장을 보고 찾아간 곳이 신림동이었다. 하지만 큰아이 아토피 때문에 반지하는 쳐다도 보지 않았고 옥탑방은 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올라가 보지도 않았다. 여기저기를 다 보여줘도 마땅치 않아하던 나에게 부동산 아줌마가 싼 값에 깨끗하게 나온 집이 하나 있다고 해서 따라갔다.

“여기 주인이 형이랑 소송 중이라 집을 싸게 내놨어. 그래도 문제 될 건 하나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보증금이 싸니까 그냥 무조건 해. 부동산에서 문제 되는 건 요즘 권해주지도 않아.”

내가 가진 돈이 넉넉했다면 이것저것 따져볼 수 있었겠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그럴 처지가 못 됐다. 가진 돈을 모두 보증금으로 건다고 해도 남편 월급에서 매달 월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분가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하고 덜컥 계약부터 했다. 이사를 하고 처음엔 뭘 하든 재밌었다. 없는 살림을 새로 장만하는 것도 좋았고 아이들을 재워놓고 남편과 맥주 한 잔 하면서 여름휴가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좋았다. 내가 우겨 친정에 들어갔지만 처가살이 몇 년에 남편도 알게 모르게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안했다. 하지만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집을 얻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도 여유가 없었다. 남편의 헤어진 옷소매를 보며. 뒤꿈치가 너덜너덜해진 구두를 보며. 아이들의 작아진 옷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돈이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그러던 어느 날. 슈퍼에 시장을 보러 갔다가 휴지와 주방기구를 잔뜩 쌓아놓고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줌마들은 거기 서서 뭔가를 적어 넣고 양손 가득 선물을 받아갔다. 마침 휴지도 다 떨어져가고 프라이팬도 시원찮던 때라 그 앞을 기웃거렸다.

“어머. 언니도 카드 하나 만들고 가요. 선물도 왕창 챙겨줄게.”

그때까지 나는 신용카드라는 걸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드를 신청하면 선물을 받을 수 있다기에 아무 생각 없이 거기다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단순한 그 행동이 앞으로 어떤 고통을 가져다줄지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 뒤 집으로 두툼한 봉투가 배달되어 왔다. 뭔가 싶어 열어보니 신용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별 생각 없이 그걸 지갑에 넣어두었다. 그때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5만7000원 입니다.”

대형마트에 세일을 한다기에 시장을 보러 갔다가 이것저것 담아 넣다보니 가지고 있던 현금에서 오버가 됐다. 고르고 골라 담은 거라 빼낼 게 없어 고민하다가 지갑에 꽂혀있던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기분이 묘했다. 마치 공짜로 시장을 본 것처럼 가슴이 간질간질 했다. 그게 바로 지옥의 서막이라는 것도 모른 체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카드로 남편의 새 옷과 신발을 사고 아이들에게 레고를 사주고 돼지고기 대신 소고기를 사먹었다. 그렇게 몇 번 카드를 그어 썼을 뿐이었다. 첫 달 카드 명세서가 날아왔을 때 나는 60만원이라는 금액이 실감이 나지 않아 몇 번을 훑고 또 훑었다. 남편 월급에서 월세와 이것저것을 제하고 나면 내 손에 쥐어지는 건 껏해야 30만원 정도였다. 이사 올 때는 몰랐는데 날림으로 지어진 집이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고 있던 터라 남편에게 신용카드 그어 쓴 것까지 말할 수 없었다. 카드에서 현금 서비스를 받아 카드 값을 겨우 냈다. 그랬더니 다음 달엔 현금서비스 받은 것까지 더해져서 카드 값이 80만원이 넘어 나왔다. 달리 방법이 없던 나는 카드 하나를 더 만들어 현금 서비스를 또 받았다. 그런 다음 생활비가 없어 다시 카드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카드 돌려막기가 시작 되었다. 빚을 빚으로 갚으면서 결국 빚만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카드 값은 이유 없이 자꾸 불어나고 있었다. 누구한테 털어놓지도 못하고 나 혼자 끙끙 앓았다. 결제대금의 일부만 갚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연기하는 리볼빙 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연체는 막을 수 없었고 카드 3개가 모두 막혀 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카드대금을 빨리 납부하라는 독촉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손하게 ‘고객님’이라 호명하며 연체금을 언제까지 납부할 수 있냐고 친절하게 물었다. 문자로도 연체된 사실을 시도 때도 없이 알려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돈을 갚지 못하자 고객님이던 호칭이 ‘김양미씨’로 바뀌었다. 채권추심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더 이상 카드로 돌려막기도 할 수 없고 대출도 받을 수 없고 돈 빌릴 데도 없는 상황에서 밤낮으로 걸려오는 독촉 전화를 받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론가 뿅 사라져 버리고 싶다.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엄마에게 전화해 돈 좀 꿔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환경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운동을 하고 있는 남편이었지만 정작 마누라는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해서까지 엄마 걱정 끼치지 말고 니 힘으로 살아보라던 언니 잔소리에 엄마 집에서 짐을 싸서 나온 지 겨우 1년도 지나지 않았다. 큰돈을 빌릴만한 친구도 없었다. 아무리 사방팔방을 돌아봐도 엄청나게 불어난 내 카드빚을 갚아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채무 독촉전화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전화를 몇 번 받지 않았더니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때부터 벨소리만 나도 오줌이 찔끔 나왔다. 집에 빨간 딱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날림으로 지은 집에서는 물까지 새고 있었지만 지난 달 월세를 넣지 못해 주인에게 고쳐달란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숨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더 이상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이젠 편해지고 싶다고.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낸 뒤 전화기를 꺼버렸다. 엄마는 내가 전화기도 꺼놓고 연락이 되지 않자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었을까봐 애를 태우다 119에 신고를 했고 우리 집에 그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해결할 생각은 안하고 바보같이 일만 크게 만들었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놓인 장본인이 아니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카드빚 때문에 누군가는 카드깡을 하고 누군가는 사채까지 쓰게 된다. 더 깊은 수렁으로 푹푹 빠져들지만 죽고 싶고 망하고 싶어서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무책임한 변명 같지만 내가 겪어보니 진짜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게 바로 카드빚이었다. 처음에 신나게 그어썼던 대가로 그 이후 몇 년 동안 후유증에 시달리며 빚을 갚아야 했다.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뼈아프게 배운 셈이다.

내가 처음 신용카드를 만든 그 무렵. 경제를 살려보자는 정부의 소비 촉진 정책의 하나로 신용카드 발급이 마구 활성화 되던 때였다. 카드를 많이 긁어 쓸수록 뭔가 이익을 보는 것처럼 앞 다퉈 광고를 때렸다. 신용카드란 말 그대로 신용을 보고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발급해 주어야 하는 것인데 가정주부나 대학생 같이 수입이 없는 사람들에게 까지 일단 발급해주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신용카드 연체 비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서민들의 신용은 갈수록 바닥을 치고 신용불량자로 내몰리는 악순환이 생겨났던 거다. 그리고 사회에서 신용불량자는 남의 돈 쓰고 안 갚는 양심불량자 취급을 받으며 불이익을 받게 만들었다. 신용불량자는 양심불량자가 아니라 과중채무자일 뿐인데도 말이다. 내가 카드를 무분별하게 그어 쓴 탓을 국가정책이나 카드사에게 돌리려는 건 아니지만 그들 또한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멋모르고 만든 카드 하나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신용카드는 자동차 운전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 운전자는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수가 계속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과속을 하거나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나쁜 습관이 굳어지면 결국 운전자도 위험하게 되고 주위 사람들도 피해를 보게 된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나쁜 습관 들이지 말고 선을 넘지 말고 신호위반 하지 않으면서 현명하게 써 나가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집으로 119대원들이 들이 닥치는 걸 봐야하기 때문이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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