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블루베리 묘목을 막 심어놓고
블루베리 묘목을 막 심어놓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지나치게 달지도 않고, 시지도 않으니 먹고 또 먹어도 물리지가 않는다. 열매가 워낙 작다 보니 포만감이 쉽게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 참 묘한 과일이다. 남의 집에 놀러 갔다가 한줌씩 얻어먹을 때는 미처 몰랐던 발견이다. 물기가 없으면 단 하루도 못 살고 시들어버리는, 물이 많아도 역시 하루를 견뎌내지 못하는, 물을 매우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성깔이 겁나게도 까탈스러워서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했던 이 녀석의 이름은 블루베리다.

탱글탱글하다. 싱싱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생동감이 팍팍 느껴진다. 참을 수가 없다. 가만히 슬쩍 손을 내밀어 본다. 손 안에 쏙 들어온다. 들어왔다 싶은 순간 툭 떨어진다. 입에 넣고 깨물면 약간의 신맛과 단맛이 혀에 착 감겨든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신맛은 요란하지 않고, 단맛 또한 과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하지만 아깝다. 함부로 아무렇게나 막 씹어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한참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고, 만지고 있으면서도 만지고 싶은 것,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인 것이냐. 설렘 가득한 단어 하나가 쓱 지나간다. 연애. 그런가? 내가 지금 새로운 연애에 빠져들어 있는 것인가? 굳이 이름을 붙이기로 하자면 푸른 딸기들과의 연애라고나 해야 할 거다.

2월에 얻어온 블루베리 묘목이 4월에 꽃을 피워냈을 때, 그 꽃을 처음 본 순간의 기쁨과 환희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밖으로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자랑을 하고 싶었다. 실제로 활터에 가서 자랑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저 사람이 지금 뭔 정신 나간 소릴 하는 거야 하는 뭐 그런 표정으로 고개나 갸웃거릴 뿐이었다.

 

꽃이 핀다.
꽃이 핀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날의 속상함이, 야속함이 너무 커서 나는 지금도 활터 사람들을 가슴 없는 로봇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웃기고 한심해서 가끔은 혼자 실없이 쿡쿡거리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철부지 같은 애초의 생각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이란 역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하긴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괜히 생겼으랴. 푸른 딸기의 꽃은 사실 꽃 같지도 않다. 색깔도 특색이 없이 밋밋하고, 향기도 없으며, 모양이 화려하거나 우아하지도 않고, 다만 하나 작은 종처럼 생겨서 약간 귀엽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꽃은 모든 꽃들의 자랑인 꿀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흔해빠진 꿀벌 한 마리 찾아오지 않고, 나비도 팔랑팔랑 주변을 스쳐가기만 할 뿐 앉지를 않으니 그 참 신기하다, 소리가 내 입에서 절로 나오곤 했다.

꿀벌이 없었어도, 나비가 암수 구별을 해주지 않았어도 열매는 생성되고 있었다. 좁쌀만큼이나 작은 열매가 작은 꽃을 밀어내면서 나온다. 생성된 열매가 덩치를 키우면 작은 꽃은 밀려나면서 시들고, 시든 채로 말라가거나 떨어진다. 꽃이 사라진 자리에서 열매는 무럭무럭 커간다.

쑥쑥 커 나가던 열매가 마침내 때가 되었다는 듯 분홍빛 물이 들었다가 다시 파랗게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서 파문이 일었다. 숨이 막히고, 온 몸이 바싹 긴장되었다. 오래 전에 헤어진, 헤어지자는 생각으로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어떻게 헤어지고 만, 그러니까 성사되지 못한 연애의 대상을 이십 년도 지나서 우연히 만나게 됐을 때의 상황이 그쯤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그쯤 된 것 같다. 이십여 년 전, 블루베리라는 말도 아직은 생소했던 그 무렵의 나는 맹랑하게도 돈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돈이 없는 세상이라기보다 돈 버는 일로 잔머리를 쓰지 않고서도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게 아마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열매가 커간다.
열매가 커간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이 세상에 문화라는 단어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농사꾼의 아들 촌놈이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접한 문화의 세계는 뭐랄까, 사자성어를 빌려 말하자면 경천동지였다. 음악이라면 ‘동무들아 오너라 달 따러 가자’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정도밖에 몰랐던 내가 ‘자크린느의 눈물’이라든가 ‘예프기니 키신’ 같은 고유명사를 서슴없이 언급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게 경천동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뿐만이 아니었다. 읽고 싶은 책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몇 번씩 반복해서 보고 싶은 영화는 또 어찌 그리도 많은지, 마음이 동하면 언제라도 훌쩍 가보고 싶은 여행지도 많았고,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작업을 시작하겠노라 맹세하며 모아둔 소설거리 역시 많고도 많았다. 그런 내가 어찌 차마 돈 따위나 벌겠다고 눈에 불을 켜는 방식의 에너지 소비를 하고 다녀야 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 몸은 무엇인가를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중단 없이 먹어주어야만 한다. 굶어죽어도 좋다는 각오까지는 아직 차마 해볼 수 없는 처지이고 보면, 돈을 벌어야 한다. 돈, 돈, 그놈의 돈, 뭐냐 이거. 아아 그렇구나. 시골로 가자. 도시를 떠나자. 촌놈이 도시에서 뭔가를 배웠으니, 이제 다시 시골로 가서 배운 것을 몸소 실천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무엇보다 도시에서는 내 돈이 없을 때 목숨을 보존할 만한 방법이 구걸이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의 치욕적인 것밖에 없지만, 시골에서는 최소한 산딸기며 도라지며 칡뿌리 등등 철따라 바람따라 자유롭고 당당하게 뒤져먹을 만한 것이 제법 있을 거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대책의 삶을 살고자 한 것만은 아니어서, 나름 중장기적인 설계를 도모하고 있기는 했었다. 그래도 명색이 사람 목숨인데 산딸기나 칡뿌리로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으냐. 다른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지? 이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나무였다.

 

물이 들었다
물이 들었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나무, 나무 이름, 그 이름이 비타민나무였다. 이름만으로도 뭔가 경제성 같은 것이 팍팍 느껴지는 이 나무는 열매가 엄청나게 많이 열리는데 그 성분 또한 다양해서 비타민 원투쓰리는 물론이고 철분, 아연, 인 등등 사람의 몸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름도 비타민나무이고, 그래서 만성적인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거듭하는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심어 왔고 지금도 심고 있다는 거였다.

원 세상에 그런 나무도 있었어? 하긴 없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 어쨌든 나는 그 나무를 심기로 결심하고 여기저가 알아보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나무를 파는 곳이 고창에는 없었다. 고창뿐만 아니라 전북에도 없었고, 어디에 가면 그 나무를 구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다. 지금이야 여기저기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비타민나무 농장이 운영 중이라는 광고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 방면으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비타민나무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한 시절이었다.

필요한 정보를 금방금방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도 아직은 아니었다. 집전화로 연결되는 천리안이라든가 하이텔 같은 피시통신이 제공하는 정보는 우리 집 책장보다 빈약하면서 전화요금만 엄청나게 많이 물게 하는 괴물이었다.

잊는다는 생각도 없이 잊고 있었던 비타민나무가 내 눈에 확, 꽂히듯이 들어온 것은 피시통신 시대가 끝나고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였다. 인터넷이 열렸다지만 아직은 면단위 촌구석 방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다. 사흘이 멀다고 읍내의 터미널 옆 피시방을 드나들던 어느 하루 그것이, 그 이름이 거짓말처럼 모니터에 떴다.

종묘회사로는 국내 최초로 홈페이지를 개설했다고 하는 그 홈페이지에 들어간 것은 아마도 실수였거나 우연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이름은 내 눈에 꽂혔다. 요놈이 여기 있었구나. 반가움과 흥분으로 한참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발견한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그것이 블루베리였다.

블루베리란 무엇이냐. 눈을 건강하게 해준단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블루베리를 습관적으로 먹고 눈이 건강해져서 하늘을 나는 새도 돌팔매로 막 잡았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 설명을 보고 나니 아 그렇구나 싶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즉각 구매를 결심했던 것이니,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익어간다
익어간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종묘회사에서 블루베리 나무를 확보해놓고 판매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에서 직수입하는데 예약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종묘회사에서도 아직 블루베리의 속성을 제대로는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물을 좋아하는 나무니까 물을 매일 한 번씩은 줘야 한다는 재배가이드가 있었을 뿐, 물을 싫어하기도 한다는 설명 같은 것은 없었다.

비타민나무와 블루베리가 공통으로 물을 좋아하면서 싫어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린 것은 재배에 실패하고도 몇 년이나 지난 뒤였다. 주문한 묘목이 도착해서 땅에 심었을 때 내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을 자주 줘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물이 쑥쑥 잘 빠져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린 묘목은 잎이 나오고 가지가 생기는 등 제법 잘 자라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해 일 년뿐이었다. 다음 해에도 녀석들은 새순을 내고, 새로운 가지가 나오기는 나왔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었다. 더 이상은 새로운 잎을 내지도 않고, 새로 낸 가지를 키우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다.

뭐냐 이거, 이 녀석들의 성질이 원래 그런 것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기가 막히게도 녀석들은 단풍이 들고 있었다. 가을은 아직 까마득히 멀건만 단풍이라니.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더란 말이냐. 황당한 마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단풍은 떨어지고, 나무는 한눈에 봐도 죽었음이 역력한 색을 띠고 있었다. 삽으로 푹 파놓고 보니 뿌리가 없었다. 뿌리가 있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녹아버린 것이었다. 썩어버린 것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이것은 배수불량이었다. 물을 좋아한다는 것만 알아서 열심히 물을 퍼주었을 뿐, 물을 싫어하기도 한다는 것을 몰랐던 탓이었다.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도 좋은 마음은 사람에게만 있다는 선입견 플러스 게으름 탓이었다.

어쨌든 나는 망했다. 그렇게도 깊은 기대를 갖고 있었건만, 그렇게도 넓은 희망을 품고 있었건만, 그랬건만 이렇게도 허무하게 가버린단 말인가.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는 느낌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고, 그 이름을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다. 요즘 자주 접하는 단어 트라우마 같은 거, 그런 어떤 것이 내 영혼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그때는 해보지도 못했다.

그것을 가령 연애에 빗대어 말하자면, 실패한 연애는 아프기 마련이다. 아쉬움도 크고, 반성도 많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도 제법 있다. 그래서 잊을 수 없다. 잊고자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 깊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시나브로 떠올라 와서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 그게 아마 실패한 연애의 교훈이라면 교훈일 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익었다
익었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안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저기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예감이 있을 때, 애써 피해 가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가야 할 길을 아예 안 가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관심의 끈을 아주 놓아버리지는 못하고 남몰래 슬쩍 힐끗거린다.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짐짓 냉담해 하면서도 옆에 다른 사람이 없으면 후딱 돌아본다.

블루베리와 나의 관계랄까 감정 혹은 상황이 꼭 그런 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비타민나무는 대충 어떻게 잊을 수 있었지만, 블루베리는 내가 설령 죽었다가 부활한다 해도 잊을 수 없는 시대가 어느새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를 가도 블루베리요, 저기를 가도 블루베리였다. 봄날에 시장을 가면 여기저기서 블루베리 묘목을 팔았고, 축제 현장을 가도 블루베리 묘목을 팔았다.

고창의 특산물로 알려진 복분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블루베리 농사로 갈아타는가 하면, 귀농한 사람들은 열에 일고여덟 명으로 블루베리를 심고 있었고, 집에서 밖으로 나갔다 하면 여기저기 도처에 서 있는 블루베리 농장 입간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목도해야만 했다. 나로서는 가히 끔찍한 시절이었다. 딱히 끔찍해야 힐 이유도 없으면서 끔찍해야 하니 이중으로 끔찍한 시절이었다.

피하고, 또 피하고, 달아나고, 또 달아나면서 나는 꾸준히 그것을 훔쳐보고 있었다. 가끔 어디 가서 우연히 열매를 얻어먹기도 했다. 돈을 주고 사서 먹지는 않았다. 가끔은 나도 블루베리 화분을 몇 개 사다가 마당에 둘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다. 하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그랬다. 그것은 어느새 용기가 필요한 일이 돼 있었다.

내 마음 나도 모른다. 어쩔 것이냐. 좋아하면서도 싫어하고,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슬그머니 보고 싶어지는가 하면 금방 꼴도 보기 싫어지는 그런 세월을 얼마나 보내고 있을 때, 그때 언제인가부터 블루베리 농사는 미래가 없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너나없이 죄다들 심었으니 생산과잉이 돼버렸다는 얘기였다.

그렇게도 많았던 블루베리 농장이 하나씩 둘씩 사라져 가고 있을 때, 그때 어느 날 내 마음에서 용기가 생겼다. 그것은 뭐랄까. 일종의 위기의식 같은 것이나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다 사라지기 전에 심어야겠다는, 그리하여 즉시 달려갔다.

고창에서는 블루베리 삽목 전문가로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에게 이년생 묘목 몇 주를 팔라고 하니 그냥 가져가란다. 그럴 수는 없다고, 내 마음대로 가격을 쳐 주겠다 해도 필요 없단다. 무조건 그냥 가져가란다.

열한 그루였다. 처음 생각으로는 대여섯 주 정도였지만 어리버리 어떻게 그리 되고 말았다. 열한 그루의 블루베리 묘목을 집으로 가져와서 화분에 심어놓고 나니 어처구니없게도,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하는 뭐 그런 바보 멍텅구리 같은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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