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고마운 남자들
내 인생의 고마운 남자들
  • 김양미 기자
  • 승인 2020.07.20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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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화암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시간이 흘러도 그 평화로운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요즘… 문득 그 남자들 생각이 난다.

내가 예전에 쓴 글 중에 대학생 때 가출해서 절에 있었던 얘기를 잠시 했었다. 치아 교정기를 끼고 시금치 먹다가 그게 목에 걸려 스님들 앞에서 코뿔소 난산하는 소리를 냈던…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무렵 함께 살았던 남자들의 이야기다.

대학을 휴학하고 집을 나와 무작정 찾아 간 곳은 설악산의 어느 유명한 절이었다. 세상 소음과 등지고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나왔건만 그곳은 유명 관광지여서 우리 동네보다 더 시끄럽고 사람들로 빠글거렸다. 어찌해야할까 고민하다 그 절의 사무장님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집 전화번호부터 적으라고 했다.

“안 적으면 안 도와준다.”

사무장님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어디 머물고 있는지 소상히 알렸다. 그리고 사무장님 전화번호도 불러주며 언제든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할 테니 아무 걱정 마시라고 안심시켰다. 그런 다음 나에게 물었다.

“얼마만큼 조용한 곳이면 되겠냐.”

나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양 손을 가슴에 얹어 나의 절실함을 알렸다. 그런 나에게 사무장님은 배부르게 저녁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내어주며 내일 새벽 일찍 길 떠날 채비를 하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 사무장님은 나를 깨워 차에 태웠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꿀렁꿀렁 넘어 하염없이 산 속으로 차를 몰았다. 꿈결인지 생시인지 안개 낀 산속을 돌고 돌아 어느 절 앞마당에 차가 섰다. 이런 깊은 산 속에 멀쩡하고 커다란 절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티끌 하나 없는 고요함.

내가 원하던 딱 그것이었다.

그곳에서 본격적인 가출생활이 시작됐다. 사무장님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엄마한테 알려주어 집에선 아무도 내 걱정을 하지 않았다. 좀 싱거운 가출이었다. 너무 조용하고 너무 심심하고 너무 할 게 없었다. 오죽하면 가톨릭신자인 내가 108배를 하며 놀았을까(하루 세 번 한 적도 있다). 낭떠러지 바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절 마당까지 스스럼없이 내려오는 고라니와 다람쥐, 절에 사는 개 고양이와 어울려 놀았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그 절에는 남자 스님이 세 분 계셨다. 두 분은 젊은 편이고 주지스님은 늙은 편이었다. 세 분 중에 한 분은 수다스럽고 한 분은 말이 없었으며 주지스님은 약주를 한 잔 하신 전과 후가 달랐다. 그리고 밥 해주는 보살님 한 분. 불목하니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나는 조용한 곳이 좋다며 산 위 암자를 혼자 쓰고 있었다. 첩첩 산중이라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를 그런 곳이었다. 주지스님은 성룡영화 마니아여서 가끔 둘이서 오징어를 씹으며 한밤중까지 성룡이 나오는 비디오를 같이 보곤 했다.

어느 겨울날에는(여름에 가출했는데 겨울이 되었다) 스키장 구경시켜 준다기에 따라나섰더니만 진짜 스키장 입구만 딱 보여주고 짜장면 먹으러 간 적도 있었다. 주지스님은 선문답 같은 유머를 즐겨 하셨는데 어디서 웃어야 할 지 몰라 나는 아무 때나 막 웃었다.

다른 스님 두 분 중 한 분은 뭔가 사연이 깊어보였다. 얼굴은 원빈 급이었는데 건강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다. 나에게 가출한 이유가 뭐냐시길래 소설 쓰러 나왔다고 뻥을 쳤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틈만 나면 좋은 책들을 골라 내 방에다 슬쩍 넣어주고 갔다(야한 소설은 없어 실망했다). 다른 스님 한 분은 말 하는 걸 좋아하셨다. 유시민을 닮았는데 방에 놀러 가면 귤이나 간식을 잔뜩 챙겨주곤 했다(물론 그 대가로 재미없는 얘기를 한참씩 들어야 했지만). 가끔 서점이나 읍내에 나갈 때면 날 꼭 태우고 나가 짜장면이나 탕수육을 사주기도 하고 책도 골라주셨다.

불목하니 아저씨. 이 분이 하이라이트였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어디서 고물 TV 한대를 구해와 안테나까지 달아주며 심심할 때 보라고 슬쩍 넣어주기도 하고. 무좀연고를 얼굴에 발라준 보살아줌마 흉도 같이 보고. 내가 살고 있는 암자에 귀신 나왔던 얘기도 재밌게 들려주곤 했다(그 이후로 진짜 귀신을 본 적도 있다). 하루 종일 아무 할 일 없이 방에 널브러져 있는 나에게 커다란 대나무를 잘라다 방에 지압봉을 만들어주고, 새끼 고양이를 데려와 껴안고 자라며 안겨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는 고아로 자라 외로움이 많다며 나를 진짜 친동생처럼 여기고 예뻐해 줬다.

나는 겁 없는 철부지였고 운 좋은 젊은 여자였다. 사무장님. 스님 세 분. 불목하니 아저씨. 그 분들 모두 남자였다. 산 속에 지발로 걸어 들어와 단정함도 야무짐도 없는 젊은 아가씨가 여기저기 빈 틈 투성이로 그곳에 일 년 가까이 머무는 동안 그 분들은 오히려 내 옷깃을 여며줬던 남자들이었다. 그곳을 떠나온 뒤에도 가끔 지치고 힘들고 외로울 땐 그 분들 생각이 나곤했다. 만약 거기서 내가 누군가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두고두고 분노와 상처로 괴로워했을지도 (몇 년 뒤에 찾아가 불을 확 싸질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만난 사람들 중에 나쁜 남자들도 간혹 있었지만 내 마음에 신뢰라는 전기장판을 깔아준 그 분들이 있었기에 인간을 될 수 있으면 믿고 살아보려 노력했던 것 같다.

살면서 뭐 대단한 선행은 못하고 산다 해도 내가 절에서 만난 그분들처럼 인연에 스크래치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훌륭한 삶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땅에서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의 아들로. 내 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오빠로. 내 가족이 무엇보다 제일 소중하다는 걸 잘 아는 남자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도 내 가족처럼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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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상처에 대하여 

언어는 잊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
몸은 기억하고 있어도 말은 잃었다
소라껍질처럼 웅얼거리는 몸통은 있어도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밑동이 잘린 나무처럼 쓰러지던
그날 이후, 잃어버린 것은 누구인가
놓아버린 것은 무엇인가 어느 곳에 두고 온 것인가
명치끝인가 갈비뼈 언저리인가 가슴께 어디쯤인가
겨드랑이인가 입술 젖꼭지 배꼽 샅 어딘가에서
캄캄한 씨앗 같은 어둠을 품고 햇살을 기다리는 것
소리를 찾느라 붉은 숨결을 고르는 여러 날
들판에 나불대는 무꽃이거나 배추꽃
새벽이슬 같은 냉이꽃이거나 상추꽃
부추꽃이거나 갓꽃이듯이
흔들리면서 발화하는 
오래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꽃,
또는 상처에 대하여

서정연 시집 <목련의 방식> 중에서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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