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징벌’에만 치중, 의료 등 교정복지도 사각지대”
“‘사람’보다 ‘징벌’에만 치중, 의료 등 교정복지도 사각지대”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20.07.2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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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서영남 겨자씨의 집 대표(前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수사(修士))-1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우리나라 교정정책과 재소자 인권이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이 많다. 수감 될 때부터 출소할 때까지 제대로 된 교화를 받지 못하거나 몸이 아파도 치료도 제때 받지 못하기도 한다. 수형자에 대한 ‘징벌’만 있을 뿐, 인격적 처우는 보기 어렵다. 재소자 인권보장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묻겠지만, 이들도 국민이고 최소한의 인권존중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하루아침에 죄인이 성인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율성이 낮더라도 장기적인 ‘인륜 투자’도 필요한 법이다.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서영남 겨자씨의 집 대표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전직 수사였던 서영남 대표는 17년 된 노숙인의 무료급식소 민들레국수집 대표다. 입소문 타고 전국에 알려진 이 집을 찾는 노숙인은 ‘하느님의 대사(大使)’로 대접받는다. 이들을 ‘손님’(Guest)이라 부르는 서 대표의 본업은 본래 ‘교정사목’(矯正司牧)이다. 민들레국수집은 부업이다. 교정위원인 서 대표에게 장기수 같은 재소자도 그에게는 ‘하느님의 대사’다.

1976년 천주교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수도회 수사(修士)로서 25년간 수도 생활을 했다. 당시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로 파견되면서 ‘평화의 집’(출소자들이 임시로 머무는 집)에서 출소자를 보살폈다. 1995년에는 전국의 교도소에 수감 된 무연고 사형수와 무기수 등 장기수들을 만나면서 음식 제공과 영치금 지원사업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서 대표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재소자 인권은 갈수록 후퇴하고 있다.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재소자 애로사항 등을 전담하는 ‘옴부즈만’ 제도가 있지만, 우리는 그런 제도가 없다. 민주화 이후 인권이 중요해졌지만, 재소자 인권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경제도 어려운데 교도 행정에 큰 예산을 쓸 이유가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20년 전 그는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아예 수도원을 나와 환속(還俗)해 수사 직을 버리고 일반 평신도가 됐다. 출소자 공동체를 위한 ‘겨자씨의 집’도 그렇게 해서 태동했다. 서영남 대표를 인천의 민들레국수집에서 만났다.

서영남 대표로부터 ‘겨자씨의 집’ 설립 배경과 재소자 인권과 권익문제를 짚어보고, 여전히 비효율적인 교정정책과 교정복지문제, 국가와 지자체, 사회의 지원, 민간과 종교단체의 교정사업 현실 등을 들어 본다.

 

- 본래 수사 시절부터 교정사목을 오래전부터 했다. 교도소 교정위원이자 ‘재소자의 대부’로서 이들에 대한 인권과 교도행정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해 달라.

▲ 여전히 우리나라 재소자는 돈 한 푼 없으면 수감생활을 감당하기 힘들다. 유전무죄 현상은 그대로다. 힘없고 빽없는 사람은 몸이 아프고 병들어도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들도 우리의 국민이지만, 건강보험도 받지 못한다.

재소자 권익 보장의 사각지대다. 교도소마다 의무과가 있다. 하지만, 예산도 턱없이 적은 데다 그마저 소진되면, 일반 재소자를 위한 의료혜택마저 돌아가지 않는다. 병 치료나 수술을 위해 외부로 나가려면 개인 돈을 부담해야 하는 등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소위 힘 있는 ‘범털’들은 의료서비스를 받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꿈도 못 꾼다. 지금은 덜하지만, 옛날에는 진찰이나 엑스레이라도 한번 받아보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했을 정도다.

 

- 교정위원을 언제부터 했는가.

▲ 1981년부터다. 처음으로 교정위원 시작한 곳이 의정부교도소다. 그 후에 서울구치소 교정위원, 영등포구치소 교정위원을 맡아왔다. 그 후 25년간 몸담았던 수도원을 나오면서부터 경북 북부 제1교도소(옛 청송교도소) 교정위원을 했으니까 거의 40년 됐다.

교정위원으로 처음에 교도소에 방문 갔을 때다. 교도관도 교정업무를 관장하지만, 당시에는 지도(指導)라고 해서 재소자 중에 머리 빡빡 깎고 완장 찬 사람이 감독관처럼 있었다. 그동안 전국의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장기수들을 만나왔다.

특히 사형수는 고등법원이 소재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 수감 되는데, 고법에서 사형집행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도와주고 회심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 부인과 신혼여행을 청송교도소로 갔다는데.

▲ 지금은 후원자가 된 아내 베로니카를 교도소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났다. 베로니카는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며 딸과 함께 살고 있었고, 큰 수익은 없었어도 아낌없이 기부금을 내주었다. 이 돈은 모두 재소자를 위한 음식과 영치금으로 썼다. 재소자들과도 애틋한 사연을 주고받는 서신을 교환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결혼식은 18년 전인 2002년 12월 겨울에 올렸는데, 신혼여행을 청송교도소로 갔다. 딸 모니카도 갔다. 한마디로 가족교정사목을 위한 신혼여행이었다. 그때부터 가족끼리 한 달에 한 번 이상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재소자 형제들을 만난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 사회 교정 사목이 말처럼 쉬운 사업은 아니다. 계기가 무엇인가.

▲ 25년 동안 몸담았던 수도회를 막상 나오니 할 게 없었다. 그전부터 해온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 옆에 있어 주는 일이 나에게 체질적으로 잘 맞았다. 그런 생각은 오래전 수도원에 있을 때부터 가졌다.

‘천주교 신자라면, 당연히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신경 써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로부터 천주교에서 공경하는 성인과 복자 모두가 사형수 출신이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도 사형수였다. 순교복자수도회가 순교하신 이들에게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 ‘교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직은 낮다.

▲ 교정은 삐뚤어진 것을 바로 잡고 고친다는 뜻이다. 교정사업은 범죄나 비행으로 삐뚤어진 사람의 인격을 바로잡는 작업이다. 이들을 교화하고 처벌보다 재활에 역점을 두고 사회적응과 교육, 정상적인 시민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숭배와 성공지상주의, 입시와 취업 등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 등으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출소한 사람을 대하는 눈도 너무 따갑다. 감옥에서 사람이 개과천선했어도 사회가 받아주지 않고 냉랭하다. 국가의 갱생보호원이 있지만 허울뿐이다.

사실 이런 체제에서 교정복지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 교정사목도 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보통 교정에 대한 일반 사람들 인식은 ‘재소자들이 종교를 통해 건강한 사람으로 거듭난 것으로 안다. 물론 교정사목이 재소자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이나 인간적인 소통을 통해 변화 받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정제도는 아직 그런 단계에 와 있지 못하다. 시설과 정책이 사람을 바꾸는 데 중점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범죄문제를 다룰 때, 사회-경제적 측면도 들여다 봐야 한다. 단순한 외면적 교정이 아니라, 참다운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만드는 내면적 접근이 필요하다.

 

-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지적한다면.

▲ 무엇보다 처벌을 넘어 갱생과 재활체제로 가야 한다. 교정 당국이 노력을 많이 하겠지만, 민간이나 사회, 종교 등 교정단체들의 교정에 따른 다양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면도 간과하기 어렵다. 단순히 생필품 지원에만 그치는 낮은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투자도 함께 따라줘야 한다. 적정한 교정시설도 필요하지만, 사회복지 전공자를 채용해 교정전문가로 양성할 필요가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전담할 전문 카운셀러를 두고 직업교육을 활성화해 출소 후 사회 복귀율을 높여야 한다.

또 격리와 감시를 넘어 외부세계와 교섭하면서 통일화된 교정행정이 중요하다. 시스템을 통한 일관된 지원, 즉 재소자를 밀접관리하면서 출소 후 사회 정착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여기서 출소자를 직업 전선에 바로 투입하기 전에 지역사회의 요양원이나 병원 등 공공시설에서 일정한 기한 동안 봉사하게 해 사회적 숙성기간을 두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사회봉사로 새로운 깨달음과 의미를 찾는 계기도 된다.

 

- 일할 수 있는 직업과 정착지도 필요할 텐데.

▲ 국가가 출소자를 위한 거주 시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자유롭게 마음껏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농공단지나 공동체에서 이들을 먼저 고용한다든지 해서 공동체 생활에 적응시키면서 진정한 갱생의 기회가 되도록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교정복지도 종교적, 제도적, 인도적으로 정책적 도움을 통해 수감자들이 거듭나도록 바뀌고, 물질적-정신적으로 삶의 기반이 잡힐 수 있는 행정서비스가 구축되어야 한다. 특히 그들이 사회에 잘 복귀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할 때까지 지속적인 관심이 중요하다.

 

- 조선 시대에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그때에도 요즘의 교정사목과 같은 실천적 선행이 있었다. 당시에 순교자들의 사랑과 헌신적 희생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는데,

▲ 1801년 신유년에 어린 순조가 즉위할 당시, 대비 정순왕후가 섭정하면서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 금압령을 내렸다. 당시 진보 사상가와 천주교인 100여 명이 극형을 당했고, 400여 명이 지방으로 유배됐다.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도 전남 강진으로 유배됐고, 정약종과 이승훈, 권철신 등도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신유년 박해는 약 1만 명에 달하는 천주교도와 노론세력에 반대한 남인 등 진보파를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박해라는 측면도 있다.

순교자들은 인간의 자유와 사랑, 영원, 불멸성 등을 위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인이 체포돼 감옥에 잡혀 와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다른 감옥에 잡혀 온 일반 잡범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며 음식을 함께 나눠 먹었다는 기록들이 무수히 많다.

자신이 먹을 밥도 적은데도 죄수들과 같이 나눠 먹고 내주는 모습에 감화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고 세례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작은 예수’였다. 적어도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 줘야 한다.   <2회로 이어집니다.>

 

서영남 겨자씨의 집 대표
  1976년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입회
  1985년 종신서원 후 가톨릭 신학원 졸업(혜화동)
  1995년 전국 교도소 장기수 면담 활동 시작
  1998년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 집'에서 형제들과 동고동락.
  2000년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기 위해 25년간의 수사 생활을 접고 환속(천주교 서울대    교구 교정사목위원회 파견) 
  2001년 출소자를 위한 겨자씨의 집 운영 
  2003년 4월 노숙자 무료 식당 '민들레 국수집' 오픈

∎상훈 : 2008 MBC 사회봉사대상 본상 / 2011 제1회 국민추천포상 국민훈장 석류장 / 2011 일가상(사회공익부문) / 2013 포스코 청암상 봉사상 / 2016년 법무부 장관상 수상(교정위원) / 2020 서울신문·법무부·KBS 주관 ‘제38회 교정대상’ 자애상 수상 

∎후원 : 농협 147-02-264772 서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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