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창 앞의 매화나무
창 앞의 매화나무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오래된 소망이 뜻밖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때의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지도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소망이 깨지고 말았을 때의 기분은 또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지어준 집에 새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면 나는 아마 굉장히 기뻤을 것이고, 그 기쁨을 에너지로 뭔가 대단히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쁨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하필이면 우편함에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박새 때문에 우편집배원과 내가 함께 웃어대며 난감해 했던 시절, 그 해에 나는 아주 작은 집 한 채를 지어서 우리 집 토방 위 높직한 곳에 달아주었더랬다. 하지만 새들은 그 집에 입주하지 않았다. 이게 뭔 시추에이션이냐고 묻기라도 하는 듯이 출입문 앞에 앉아서 몇 번 짹짹거리다가 포롱, 날아가 버린 게 전부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들이 관심을 갖고 그 집을 들어가 보기라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집에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길러내는 장면을 목격한 적은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정성을 다한 노고를, 바람을 이렇게도 무시해 버려도 되는가. 그래도 괜찮은 거야? 새들에게 묻고 따지며 시비라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언어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빈 새 집을 가끔 바라보며 속상해나 했을 따름이었다.

내가 무슨 전세를 놓겠다는 것도 아니고, 월세를 받겠다는 것도 아니거늘, 왜 한 녀석도 입주를 희망하지 않는 것이냐 응? 왜, 왜, 왜.

그런 불평불만의 어느 순간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기 보다는 발견했다. 돈 많고 집도 많은 부자들은 마음고생이 참 극심하겠다. 하긴 그래서 ‘우리’도 힘들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자랑하듯이 큰소리로 하는 것이겠지. 내가 만약에 전세나 월세를 놓을 목적으로 집을 지었는데 원하는 세입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오래 전에 지은 새 집
오래 전에 지은 새 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부자라는 것은 일단 그 반열에 들어섰다 하면 무한욕망의 덩어리가 돼버리는 까닭에 돈이 아닌 다른 것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괴물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쯤은 나도 어지간히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면 부자라는 이름의 그 조밀한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고 보면 한동안 세상을 횡행했던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은 그 얼마나 무책임하고 잔혹한 문장이었던가.

어쨌든 작은 새 집을 지어서 거기에 걸어놓은 나의 소망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월세든 전세든 세를 받을 목적으로 새 집을 지어서 새들이 입주하기를 바랐던 게 아니라 그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키워가는 그 모습을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자 함일 뿐이었다. 그런데 새들은 나의 그런 순수성을 믿어주지 않았다. 인간이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이 아마 새들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어쩔 것인가. 내가 새들의 믿음을 얻지 못 했다면 그 잘못은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날마다 새들을 향해 나를 믿어달라고, 나는 너희들을 잡아먹는 적괴가 아니라고, 나는 너희들과 친구 맺기를 소망할 뿐이라고 외쳐야 하는가?

아니다. 답은 오래 전에 이미 나와 있었다. 그 답은 누가 내게 가르쳐줘서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답이었다. 오래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열 살도 되기 전의 어느 하루, 거센 비바람에 나무가 쓰러지고 산사태가 나서 논밭을 죄다 훑어 내리는 등의 난리가 지나고 난 뒤였다. 물난리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어른들의 물청소나 돕고 있는 내 눈에 새끼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드러나 있는, 날개가 어지간히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날지는 못 하고 뒹굴 듯이 흙바닥 위를 뒤뚱뒤뚱 서툰 걸음을 걸을 수나 있을 정도의 작은 새끼 새 한 마리, 참새인지 할미새인지 종류 구분조차 어려운 그 녀석은 흡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 물어보고 어쩔 필요도 없이 그 녀석은 이 세상의 무엇인가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나는 그 선물을 방으로 들여놓고 온 종일 들여다보는 등의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녀석은 좁쌀을 씹어서 입에 넣어줘도 안 삼키고 물을 줘도 안 삼키고, 힘들게 잡아다 준 벌레마저 입에 넣어주면 뱉어버리기를 사흘인가 나흘인가, 하여튼 죽어버렸다. 그때 나는 아마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유라는 두 글자가 유전인자에 콱 찍혀 있는 녀석들은 그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런 둥지가 있었을 줄이야
이런 둥지가 있었을 줄이야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물론 전문적으로 집요하게 연구를 한다면 앵무새처럼 길을 잘 들여서 어깨 위에 얹고 다니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내 관심의 깊이는 그렇게까지 계산적으로 치밀하지가 못했다. 나는 다만 굶어죽어도 자유를 택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새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 내밀하고도 생생한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싶은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새들은 역시 새들이었다. 천적이 많은 새들은 둥지를 감추는 기술도 날갯짓만큼이나 자연스러워서 나로서는 감히 찾아볼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고, 어느 날 홀연 새끼들을 데리고 마당에 나타나서 날기 훈련을 시키느라 갖은 요란을 다 떨어대고 있는 새들을 보며 그것 참, 하는 감탄사나 토해낼 따름이었다.

그런데 금년에 이변이 생겼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너무 따뜻했고, 겨울다운 겨울은 언제나 오려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봄날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꽃들이 일찍 피어났고, 나비와 나방이들도 일찍 알을 낳았다. 알에서 애벌레가 나오면 새들의 천국이 시작된다. 새들은 정신없이 짝짓기를 하고, 목욕을 하고 어딘가에 은밀히 집을 짓느라 입에 검불이며 흙 같은 것을 부지런히 물고 다녔다.

작은 박새 한 쌍이 우리 집 장작창고를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당연히 우연이었다. 처음부터 녀석이 장작창고 어딘가에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아니었다. 녀석들이 왜 자꾸 장작창고를 드나드나 의아해서 눈여겨보던 어느 순간 입에 부드러운 검불이 물려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녀석들의 행동거지를 집요하게 주시하기 시작했지만, 녀석들은 결코 나를 허용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장작창고 앞의 무화과나무에 앉아서 좌우사방을 부지런히 살피다가 장작창고 안으로 홱, 날아 들어가곤 했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으면 짹짹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저쪽으로 폴짝폴짝 뛰다시피 하는 날개짓으로 눈속임을 하고, 슬쩍 자리를 피해주면 거의 총알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 들어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웃겨 보이던지 혼자서 실실 웃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사람이 보고 있는 데서는 집도 짓지 않겠다는 배짱이로구나. 당연히 알도 안 낳겠지. 에라 이놈들아 잘 먹고 잘살아라, 하고 그만 포기하기로 결심한 다음 날 기절초풍할 만한 장면이 무슨 엄청난 선물처럼 내 눈에 쏙 들어왔다.

 

어느새 새끼까지 나와 있고
어느새 새끼까지 나와 있고
먹을 것을 넣어달라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먹을 것을 넣어달라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째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은 가끔 있었다. 사람을 극도로 싫어해서 걸핏하면 꽤액꽤액 소리를 질러대는 커다란 새가 내 방 창문 바로 앞에서 마치 소외당한 가족처럼 너무 자주 얼쩡거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뭐 그런가 보다 했을 뿐,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관심을 갖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만 보면 저만치 달아나며 공격적으로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녀석이 어쩐 일로, 신기하게도 멀리 달아나기는커녕 나란히 서 있는 매화나무 두 그루를 중심으로 왔다갔다 부산을 떨어대며 꽤액꽥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는 거였다.

매화나무 두 그루는 방에 앉아서도 그 커가는 모습이며 꽃이며 열매들을 지켜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창문 바로 앞에, 일 미터도 채 안 되는 자리에 심은 거였다. 전체 높이가 4미터 정도로까지 자라난 매화나무 사이 어딘가에 뭐가 있는 건가? 뭐가 있다는 거지?

의문이 산처럼 컸지만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와서 한참을 꼼짝도 안 하고 있자니 꽥꽥거리던 새들이 떠났다. 즉각 문을 열고 나가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매화나무 가시에 얼굴이며 목덜미를 찔려가며 살피기를 얼마나 하다가 드디어 보았다.

작은 가지가 얼기설기 뻗어 있는 위에 무슨 쓰레기 뭉치 같은 것이 있는데 이건 물어볼 것도 없이 둥지다. 새들 특유의 집이다. 그 위치와 각도가 제법 절묘하다. 아무 생각 없이 보아서는 보이지가 않고, 팔을 높이 뻗어도 닿지 않는다. 사다리까지 동원해서 탐색을 한 결과는 놀라웠다. 집을 짓고 알까지 낳았을까 했는데 알 정도가 아니다. 새끼들이 이미 알을 깨고 나와 있다.

새끼들은 아직 사람을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훈련까지는 못 받은 모양이다. 인기척에 입을 쩍 벌리고 먹을 것을 넣어달라고 보채기까지 하는 새끼 새들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에서 콸콸 물이 흘러내린다. 와아, 이런 대박이 있나.

세상에, 이렇게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 녀석들이 알을 낳아서 품고 있을 때는 내가 드나들어도 알 품기에 집중하느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그들이 창문 바로 앞에 집을 지었다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런데 바야흐로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니 녀석들은 긴장이 고조되고, 무시로 드나드는 인간이 꼴 보기 싫어 꽥꽥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내가 녀석들의 둥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됐다고 보면 아마 정확할 것이다.

 

고양이의 공격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새끼를 잃은 어미새
새끼를 잃은 어미새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나저나 이해가 안 된다. 작은 박새나 참새도 산란실은 매우 은밀하게 짓고, 일반 까치는 아예 드러내놓고 짓되 사람이나 보통 동물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의 높은 곳에 짓거늘, 이 녀석은 덩치가 거의 까치급이나 되면서 어쩌자고 사람 집의 창문 바로 앞에, 그것도 겨우 2미터 정도 높이에 산란실을 차린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이해가 안 돼서 이런저런 온갖 상상에 망상을 해본다.

바빴을까? 시간이 너무 없었을까? 꽃 피는 봄날이 이렇게도 빨리 올 줄은 몰랐고, 암수 둘이서 노는 재미에 푹 빠져서 그만 알을 낳아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을까?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하루 암컷이 어머, 어머, 어떻게 나 어떻게 해. 큰일 났네 큰일 났어, 그런 것일까? 그리하여 수컷이 정신없이, 밤을 세워가며, 웬수같은 사람 따위는 생각하고 어쩔 틈도 없이 허둥지둥 그렇게 내 방 창문 앞에 집을 지었던 것일까?

그건 그렇고, 이 녀석들이 온전하게 다 자라날 수 있다는 보장은 아무래도 없어 보인다. 새끼들은 이제 곧 그 나름의 대화를 하게 될 것이고,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소리까지도 감지해서 귀를 쫑긋거리는 고양이가 그 소리를 놓칠 까닭은 없을 것이다. 날아가는 새도 껑충, 한순간에 공중제비를 돌면서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잡아채는 고양이가 아닌가 말이다.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새들이 유난을 떨고 있었다. 하도 시끄러워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뭔가 내 머리 위로 휙 지나간다. 그리고 들린다. 꽤액꽥 하는 소리, 그것은 분명 적개심이 최고조에 올랐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새들의 완전한 적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녀석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미 혼자서 나를 상대하는 줄 알았다. 잠시 뒤에 보니 아니다. 새끼들의 아비인지 친척 어른인지 내가 알 수는 없다 해도, 일단은 아비로 여겨지는 또 한 마리가 가세해서 나를 공격한다. 그런데 이건 또 뭐냐. 둘이 아니다. 셋이다. 셋인가 하고 보니 셋도 아니다. 넷, 다섯이나 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끊임없이 교차로 날아다니며 저주를 퍼부어대는데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어쨌든 최소한 다섯 마리다. 다섯 마리 이상의 큰 새들이 나를 격파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공중전을 편다. 갑자기 오싹해진다. 히치콕의 영화 새가 생각난다. 한두 마리의 새가 한 가정을 공격하고, 마침내는 온 도시를 새들이 점령해 버리는 영화, 내가 혹시 그렇게 되는 건가. 새한테 쫓겨서 달아나게 되는 건가.

은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아프다. 애석하다. 고양이는 위기를 감지했을 때 새끼를 입에 물고 다른 데로 옮겨 가기라도 한다지만, 새는 아마 그런 식으로 자기 새끼를 옮겨가지도 못한 것 같다. 무참하게 망가진 둥지 근처를 하루 종일 배회하며 깩깩거리고, 내가 다가서면 머리 위로 휙휙 위협적인 날개짓 소리를 내며 깨액-깩거리다가 지치면 죽은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며 악악거리는데 그것 참 돌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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