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처럼 느리고 천천히
달팽이처럼 느리고 천천히
  • 김양미 기자
  • 승인 2020.08.25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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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나는 어려서부터 잠이 별로 없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인데다 눈을 뜨는 순간 몸을 발딱 일으켜 뭔가 재미난 일을 찾아 나서는 쪽이라 어른들은 나에게 ‘참 부지런하다’는 칭찬을 자주 해주었다. 하지만 나보다 세 살 많은 바로 위에 언니는 어려서부터 잠이 많고 게으른 편이라 어른들에게 자주 혼이 났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정시 등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단 한 번의 지각도 없이 빛나는 열세 개의 개근상을 받아냈다. 그런 나에 비해 언니는 꼴랑 한 장의 개근상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언니는 우등상을 주로 받았다. 말하자면 나는 성실함으로 승부를 본 쪽이고 언니는 성적으로 모든 걸 무마하는 쪽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주 가끔 언니와 같은 시간에 등교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언니는 학교를 가다 가방을 길바닥에 내려놓고 그 속에서 숙제노트와 삼각자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곤 했다. 학교를 안 가면 안 갔지 준비물은 빠짐없이 챙기는 이상야릇한 범생이었다. 거기다 수업 종이 울려 교실까지 뛰어가야 될 판국에도 언니는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면 오른 손을 왼편 가슴 위에 단정히 얹어놓고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걸 하곤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한심하든지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언니 등을 떠밀었다.

“지각이라고 쪼옴~~~!!”

그리고 이건 내가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언니가 유치원 다닐 때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잠이 많은 언니를 아침에 겨우 겨우 깨워 입에다 밥숟가락을 물려준 뒤 엄마는 언니의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주고 있었다. 순한 건지 게으른 탓인지 몰라도 아무튼 언니는 아기 때부터 한번 눕혀놓으면 고자리 고대로 누워 잠을 잤고 때문에 뒤통수가 유난히 납작했다.

엄마는 그날따라 둘째딸의 뒤통수가 무척 얄미워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를 땋다가 손바닥으로 찰싹(언니는 철썩이었다고 했지만) 납작한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며 ‘너는 왜 맨날 이렇게 늦잠을 자서 엄마를 힘들게 하니?’ 라고 야단을 쳤다. 기분이 나빠진 언니는 울면서 유치원에 갔고 원장 선생님이 ‘너는 왜 또 지각을 했니?’ 라고 묻자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원장 선생님은 기함할 듯이 놀랐다. 언니를 개나리 반에 들여보낸 후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마침 돌아가신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은미가 유치원에 와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엄마는 원장 선생님과 쌍으로 기염을 토했고 아침에 머리 한 대 쥐어박았던 파장이 결국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둘째딸이 너무 괘씸해서 언니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뒷마당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자야언니(우리 집에서 일을 도와주던 언니)에게 은미가 돌아오면 엄마가 죽었다고 전하라고 했다. 말하자면 복수인 셈이었다. 유치원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 졸린 눈을 한 언니가 대문을 밀고 들어왔고 자야언니는 한껏 과장된 목소리로 우는 척 연기를 했다.

“은미야,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어 흑흑~~~”

엄마는 뒷마당에 숨어 언니의 표정을 주시했고 자야 언니는 울음을 터트리며 엄마를 찾을 작은 계집애를 보며 웃음을 터트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고 작은 계집애는 전혀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오르려는 언니의 납작한 뒤통수에다 대고 자야 언니는 한 번 더 힘껏 외쳤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니까!!!”

그때 언니는 슬로우 비디오 마냥 고개를 돌리며 자야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뒷마당에 숨어 있는 거 내가 다 봤거드은.”

행동이 굼뜨고 게으르긴 했지만 눈치는 빨랐던 모양이다. 뒷마당에 숨어있던 엄마는 결국 복수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끔씩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 한 대 쥐어박았다고 지 엄마를 죽었다 그러는 애가 어딨니 그래.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원.

하지만 언니는 가족 중에 엄마를 가장 잘 챙겼던 사람이기도 했다. 위가 좋지 않아 매운 것을 전혀 드시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대구 지리나 전복죽을 자주 끓여 드렸고 끼니마다 까다로운 엄마의 입맛에 맞춰 식단을 차려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곁에 모시며 밤낮으로 보살펴 드렸다. 그러고 보면 유치원 때 엄마를 말로 한번 보내고, 그 후로 몇 십 년이 지나 진짜 제대로 보내드린 셈이다.

지각 한번 안 한 부지런한 나보다 게으른 언니가 더 오래오래 엄마를 보살폈다.

그러고 보면 언니는 달팽이를 닮았다.

느리고 천천히… 지치지 않을 만큼씩 움직였다.

어쩌면 사랑의 진짜 모습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달팽이 / 패닉(이적)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 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모두 어딘가로 차를 달리는 길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해는 높이 떠서 나를 찌르는데 작은 달팽이 한마리가
어느새 다가와 내게 인사하고 노랠 흥얼거렸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내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속에서
모두 잊게 모두 잊게 해줄 바다를 건널 거야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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