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만개한 옥잠화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예약 주문한 책이 배달되던 날 우리 집 마당에 옥잠화가 피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바다에 들어가려고 갯벌을 향해 달리는 중인데 택배 회사 명의의 문자가 떴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배달이 오전 중에 있을 예정이라는 문자였다. 갯벌에서 땀을 엄청나게 흘리고 집에 돌아오니 과연 내가 십여 일 전에 예약 주문한 온라인서점 로고가 박힌 꾸러미가 토방에 놓여 있다.

꾸러미 포장을 풀기는커녕 그것을 손으로 들어볼 틈도 없었다. 토방 위의 꾸러미를 보는 순간 안에서 뭔가가 시큰, 하는가 싶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쁜 자들, 한 마디 중얼거리며 먼 데를 쳐다보고, 이어서 그냥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로 들어가서 몸에 남아 있는 바닷물을 죄다 씻어낸 뒤에서야 토방 위의 책 꾸러미를 집어들 수 있었다.

집어 들기는 했지만 포장을 풀고자 하는 욕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한 가지 과정을 더 거쳐야만 했다. 꾸러미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물을 끓였다. 끓인 물에 차 한 잔을 우려내서 한두 모금 홀짝거리고, 우두커니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가, 찻잔을 손에 들고 방안을 오락가락 서성이기를 얼마나 하다가 겨우, 간신히, 심호흡까지 해 가면서 포장을 풀고 책을 꺼내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책을 꺼내드는 그 순간에 나는 아마 이를 악물고 있었을 것이다. 눈에서는 붉은 핏줄이 금방 뛰쳐나올 듯이 곤두서 있었을 것이다. 책 한 권의 포장을 풀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의 에너지소모를 필요로 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분노와 슬픔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분노와 슬픔을, 그 잔상까지도 다스려야 할 시간이었다. 가슴을 쓰다듬지는 않았다. 책을 손에 든 채로 가만히 앉아서 심호흡을 몇 번 더 했을 뿐이었다. 심호흡을 끝낸 뒤에는 책을 방바닥에 도로 내려놓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그것이 보였다.

 

비대면 택배
비대면 택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예약 주문한 책이 왔다.
예약 주문한 책이 왔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완전한 순백으로 빛나게 피어난 옥잠화, 이런저런 온갖 나무와 풀들 속에서 조금은 화려하게, 조금은 애처롭기도 하게 피어난 그것이 내 시선을 끌었다. 기나긴 장마가 끝난 뒤로 쏟아지는 땡볕에 내 정신이 아마 얼얼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펄펄 끓는 갯벌의 소금물에 영혼이 데침을 당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꽃이 좋아서 마당 도처에 꽃을 심었건만 옥잠화가 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처음 알았으니 이게 뭐냐.

꽃이란 저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어떤 꽃이 별나게 더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내게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옥잠화는 그 무슨 슬픔의 원천 같은 느낌이어서 일단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면 눈을 게슴하게 뜨고, 고개를 갸웃갸웃 해가며 오랜 시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옥잠화는 가까이에서 코를 큼큼거리면 제법 달달한 향기가 느껴지고, 그래서 꿀이 흐를 것도 같지만 벌도 나비도 가까이하지는 않는다. 나 또한 그 맛을 혀로 음미한 적이 없다. 달달한 향기 자체가 싫지는 않다 해도, 뭔가 수상스런 느낌이 거기 어디에 있었다. 이를테면 독버섯이나 각시투구꽃 같은 녀석들이 뿜어내는 살인적인 매력 같은 것 말이다.

옥잠화가 실제로 독을 품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거기까지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라면 혹시 모르겠다. 집안에 쥐가 많던 시절 쥐약을 사 가지고 와서도 맛을 보곤 했던 어머니, 그래서 외할머니로부터 미치고 달친 무엇이라는 식의 욕을 무던히도 들어야만 했던 어머니를 내가 만일 쏙 빼 닮았다면 오래 전에 이미 옥잠화의 맛을 보고도 남았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섬세한 호기심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옛날 여인들이 머리에 꽂는 옥비녀를 닮았다 해서 이름이 그렇게 정해졌다고 하는 옥잠화는 매년 한두 개씩 포기수를 늘려간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은 일 년 뒤에 넷 혹은 다섯이 된다. 해마다 늘어나는 포기를 적절한 때에 분가를 해줘야지, 안 그러면 꽃이 아예 안 피어버린다. 어떤 식물은 개체수가 많아지면 오래된 것을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식구 수를 조절하기도 하지만 옥잠화는 그것조차도 아니다. 식구가 많아서 꽃 피워낼 정신도 없다는 듯이 그냥 그대로 포기수를 계속 늘려만 간다.

 

옥잠화 잎
옥잠화 잎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옥잠화의 그런 특질을 몰랐던 시절의 나는 꽃도 안 피는 이걸 뽑아내 버려야 하나, 어쩌나 잠시 고민도 했었다. 고민을 하던 중에 새삼 발견한 것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커다란 잎이었다. 잎이 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없어도 어쨌든 보기에 좋아서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가 통째로 옮겨 심어야 할 필요를 느꼈고, 내친 김에 포기 나눔까지 해버렸다. 그런데 이듬해 순백의 비녀 같은 꽃이 피었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아하 얘들은 식구가 많으면 태업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니, 무엇을 제대로 깊이 안다는 것은 이렇게도 많은 시간과 우여곡절이란 과정을 필요로 하는가보다.

가끔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어머니의 비녀가 옥잠화에 덧씌워져 보이기도 했다. 낭자머리라고 하는, 얼레빗과 참빗으로 곱게 빗어서 뒤로 넘긴 다음 기술도 좋게 둘둘 말아서 그것이 풀리지 않도록 꽂는 비녀, 그 비녀의 소재가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아름다운 돌멩이, 즉 옥이었다.

옥비녀가 꽂힌 어머니의 낭자를 보면서 나는 아마 최초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구체적인 사실을 부가적으로 또 알았다. 아름다움은 슬픔과 함께 한다는 것을.

낭자는 대체로 봐서 아이의 주먹 크기 정도나 되었다. 그것이 해마다 덩치를 키운다. 아이의 주먹만이나 했던 낭자가 어른 주먹 크기 정도로 부피가 늘어나면, 그러면 귀신처럼 머리카락 장사가 찾아온다. 머리카락 장사가 방문한 날이면 어머니의 낭자는 다시 아이의 주먹 크기 정도로 작아진다.

돈이 귀하던 시절 어머니의 손에 푼돈이나마 돈을 쥐어주곤 했던 어머니의 낭자머리가 언제 어떻게 해서 사라졌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내게 남아 있지 않다. 희미하게 떠도는 어렴풋한 기억으로 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유행이었다. 유행도 아주 큰, 충격이 너무 커서 제대로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큰 유행이었다.

어느 하루 엄마들이 단체로 읍내를 나가더니 머리카락이 죄다 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서로의 머리에 대한 품평회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일명 파마머리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도 벼락처럼, 귀신처럼 다가와서 엄마들을 설레게 했고, 그리고 아이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진실로 그것은, 비녀가 사라진 엄마의 모습은 이상하고 괴상해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게 되던 것이었다.

 

옥비녀를 닮았다
옥비녀를 닮았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쨌든 뭐 그렇다. 뙤약볕이 자글자글 내리쬐는, 순백의 옥잠화가 피어나는 이 계절에 나는 바다 일을 다니는 와중에도 정신을 아주 놓아버리지는 않고 책을 한 권 샀다. 간단하게 그냥 산 것이 아니라 예약까지 해 가면서 샀다. 그러니까 아직 시중에 풀리기도 전의 책을 산 셈이다.

시중에 풀리기도 전의 책이라면 당연히 1판 1쇄가 되지 않을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책을 들고 겉표지를 넘기다 말고 문득 그것을 확인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1판은 맞는데 1쇄는 아니다. 2쇄다. 놀랐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나보다도 먼저 책을 예약했더란 말인가.

나는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읽으려고 예약 주문까지 한 책이 아니었다. 딱히 뭐라고 진술할 만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애당초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안 했으니 진술할 만한 내용도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이런 나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심지어는 법률적으로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는 자로 지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 보자. 읽지도 않을 책을 왜 산 거냐. 사 놓고 마음에 차지 않아서 안 읽은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아예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게다가 그 책은 아직 시중에 나오지도 않았다. 예약을 해야만 구매 가능한 것이었다면 수량도 한정돼 있었을 것이다. 읽지도 않을 사람이 먼저 예약을 해 버리는 바람에 정작 읽고자 한 사람은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것이고, 따라서 너는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인정하는가?

뭐 대충 이런 식의 엉망진창인 문제의식을 갖고 덤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그리고 넓게 알아보고자 할 것이다. 드물게 명민하고 순발력이 좋아서 정보력도 출중한 자칭 인텔리 경찰관이나 검사라면 혹시, 정말로, 나를 부르기도 전에 도주의 우려와 증거인멸의 염려가 매우 높다는 이유로 체포영장을 신청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문학적 소양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법원은 이거 큰 문제네, 하고 영장을 발부할 수도 있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 집은 영장 집행을 위해 급히 달려온 수사관들로 북적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체포되고, 감옥에 갇힌 채로 매일 한 차례 이른 아침 소환되어 밤늦게까지 같은 질문을 되돌이표로 반복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취조를 받고, 그리고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재판의 특징은 딱히 뭐라고 말할 만한 쟁점이 없다는 점이다. 쟁점이 뚜렷하지 않은 재판의 특징은 사람을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개미처럼 이쪽으로도 굴을 파고 저쪽으로 굴을 파고, 천지사방 아무 데로나 굴을 파서 뭔가 굉장한 것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호도해서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긴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이것을 우리는 여론재판이라고 한다.

 

이제 막 피어나는 옥잠
이제 막 피어나는 옥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민주국가에서 구성원들 각자의 생각은 매우 중요하지만, 일단 여론재판이 형성되고 나면 구성원들 각자의 생각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홍수가 났을 때 급류에 휩쓸려가는 송사리 떼처럼 흐름을 따라서 그냥 우우, 몰려갈 따름이다.

이런 한심한 재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분명한 쟁점이 없다 보니 수사 인력도 많이 필요하고, 수사관을 지휘하는 검사도 많이 필요하고, 엉터리 검사와 수사관들이 정리랍시고 해놓은 것들을 그나마 제대로 들여다보자면 판사는 골머리를 흔들어가면서도 장마처럼 길게, 후덥지근하게 재판이라는 것을 재판 같지도 않게 질질 끌어나가야만 한다.

게다가 이런 한심한 재판은 훗날 반드시 재심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리하여 바로잡히게 되면, 국가는 피해 당사자에게 막대한 금액의 금전적 보상 내지는 배상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이 돈을 엉터리 수사관과 검사들이 연대책임으로 물어내는 것도 아니다.

아, 따분하다. 명색이 인간이라고, 지구상에 태어나서 의기양양거리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이런 따분한 상상이나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 상상이라면 모름지기 팔도에 하나씩 자신의 복제인간을 파견하는 홍길동이거나, 소인국과 거인국을 두루 관광하는 걸리버 여행기 쯤은 되어야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로 하여금 이토록 소모적인 상상이나 하게 만든 이 땅의 검찰관들이 나는 진실로 저주스럽다.

움직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같은 물이라도 계속 흔들어주면 살아서 싱싱함을 자랑하지만, 가만히 둬버리면 썩어서 악취를 풍긴다. 바다에 나가서 보면 그것을 명징하게 느낄 수 있다. 밀물과 썰물이라는 정밀한 장치가 없다면, 바닷물이 비록 소금을 함유하고 있다 해도 오래 전에 이미 썩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하고 싶다. 아니 묻고 싶다. 소녀의 일기장이 그리도 탐나더냐? 너희의 사전에 상식이란 없는 거냐?

그렇다면 한 가지 가르쳐 주마. 상식은 법률 따위가 차마, 감히 넘볼 수 없는 한참이나 고귀한 상위개념이다. 법은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를 가정해서 준비해둔 이를테면 부가적인 장치이고 말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몰라서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다는 훌륭한 욕구가 발동한다면, 나를 불러 보거라.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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