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위클리 마음돌봄: 여덟 번째 돌봄, 집에 대한 단편

[위클리서울=구혜리 기자] 아프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음 이전에 질병과 사고를 완전하게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잘 이겨낼 수는 있다. 도리어 이를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의 삶은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온 신경은 아픈 부위에 집중된다. 하물며 감기나 생채기 하나에도 처방을 받거나 적절한 요법을 취하는데 마음에 난 상처에는 유독 무관심하다. 하지만 마음에도 돌봄이 필요하다. 위클리 마음돌봄은 삶에 관한 단편 에세이 모음이다. 과열 경쟁과 불안 사회를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스스로와 사회를 돌아보는 글이다. 글쓴이의 마음의 조각을 엿보는 독자에게도 작은 위로를 전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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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우리 집

밤보다는 아침이 좋다. 집에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창을 활짝 열어두고 집안을 가득 채우는 빛과 바람을 느끼는 것. 그 작은 것에 삶이 감사해진다. 가끔 늦게 일어나거나 일이 많아 밤이 저물어버리면 낮을 빼앗겨버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사를 했고, 낯선 환경에 새벽마다 고양이가 울어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독립한 지도 벌써 5년 차에 접어든다. 대학교 1학년을 송도의 기숙사에서 보내면서, 걸어서 강의실에 다다르는 게 익숙해져 2학년에 올라와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통학하는 길이 힘들었고, 청소년 시절 내내 성인이 되면 당연히 스스로 힘으로의 살아야지, 라는 가치를 품고 살았다. 첫 집은 학교와 붙어 있는 월세촌 원룸에서 공강 때마다 집으로 쉬러 가는 길 동기들에게 부러움을 샀고, 두 번째 집은 이보다 좀 더 떨어진 곳에서 방을 늘려 고양이를 모셨고, 세 번째 집은 방을 하나 더 늘려 도시민박을 했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늘 고양이 울음소리와 사람냄새로 채워졌다. 그 숨결과 온도, 따뜻하고 정겹게 채워냈다.

졸업을 앞두고 가득했던 것들을 비워내야 했다. 다시 혼자가 되는 건 때론 두려움이 되었지만 홀로임에 단단해져야 했기에. 좀 더 어릴 땐 사람들과 함께인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성격 유형 검사를 하면 항상 외향적, 사교적인 인물이 되어, 그렇구나 하고 내재화했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요즘엔 필자가 고요 속 기쁨을 받아들이고 가꿀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특히 혼자여도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것이 튼튼한 자아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얼마 전 생일을 맞아 지인들이 집에 놀러왔다. 생일파티와 더불어 집들이를 핑계로 음식과 술을 양 손 무겁게 들고 왔다. 또 어떤 이들은 직접 찾아오는 대신 집으로 선물을 보냈다. 꽃과 향초, 무드등, 산문집…. 마음을 담은 것들을 집에 가득 채워 불을 끄고 다함께 눕는다. 시끌벅적하게 웃음으로 채웠던 곳, 케이크와 요리, 배달 음식의 냄새를 타오르는 향으로 지우고, 우리는 술기운과 향을 덮고 잠에 든다. “혼자 잘 때 안 무서워?”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처럼, 역시 잠들기 직전까지 고요를 깨는 수다가 있어야지. “가끔 무섭지.” 근데 혼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들어. 여기저기 베인 흔적들이 남아 가득 채워진 기분이 들어.

 

ⓒ위클리서울/ 구혜리 기자

청년주거, 불안정한 삶에 대해

20대를 모두 서울에서 홀로 살며 어딘가에 세 들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 속에서 나는 ‘소유’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었다. 싫증이 빠르고 여행과 공유 플랫폼에 익숙한 20대 초반, 집도 결국 물질이라 세월이 흐르면 낡고 닳아 가치가 떨어지는데 그보다는 늘 새 것에 머물며 좋은 것을 취하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 왜 N포 세대의 목표가 ‘내 집 마련’이 되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런 고민들은 그저 집이 없는 청년이기 때문에 생긴 자기합리화가 아닌지 도리어 회의감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불안정한 떠돌이 삶에서는 ‘좋은 것만 취할 여유’를 부릴 수 없다. 내 집이 없다는 건 안정을 위협한다. 2년이라는 짧은 주기에 이사를 염두 해야 하고 이 때문에 짐을 최소화해야 한다.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내가 사랑하는 것을 채울 수 없다.

특히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세입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용인해야 한다. 대학가의 월세촌은 소위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와 불법건축물에서 곰팡이 등 열악한 환경으로 생명권을 위협받고, 운이 나빠 보증금을 떼이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깡통전세에 재산권을 침해받아도 그저 ‘다 그렇다’는 강압에 참는 수밖에 없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저마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인 내 집이 결코 평범한 삶으로는 꿈꿀 수 없는 미래가 되고, 이렇다보니 초등학생 때부터 ‘내 집 마련’과 ‘건물주’가 목표인 사회가 되어버렸다.

1989년 주택임대차보호법 이후 31년 만인 2020년 7월 30일, 계약 갱신요구권 보장과 임대료 인상 상한제, 전월세신고제를 내용으로 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나는 임대인이면서 동시에 임차인의 이중 지위에 있으면서 이 법안이 썩 달갑지 않았다. 물론 권력 관계가 명확한 계약 관계에서 기울어진 관계를 평등하게 세울 지지대로 임대차 3법은 주거안정에 대한 의지 표명에 대한 첫 발로 충분히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 법안만으로 우리사회에서 부패하는 부동산시장의 악순환을 결코 끊을 수 없다.

우선 4년(2+2) 계약갱신권이 실질적으로 세입자의 주거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 2019년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에 따른 임차인의 평균 거주기간이 3.2년 수준으로 자가 거주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은 임대차 계약에 따른 주거 불안정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작 4년의 계약갱신요구권 보장은 현 상태에서 임차인들의 계속거주권을 크게 확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계약갱신요구권이 주거 불안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4년을 보장해준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4년만 채우면 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 되는 우리사회 모습을 보건대 4년 계약갱신권이 세입자를 위한 안전망으로서가 아닌, 세입자에 대해 합법적인 폭력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한쪽에서 이 법안을 놓고 4년을 주기로 전월세 폭등을 우려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번 법안을 놓고 자금 융통에 발목 묶일까 고조되는 임대인들의 불안은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카오스를 배경으로 전월세 급등에 가속을 박찰 것이다. 또 임대인의 자금융통 장애가 주택시장과 금융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일률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 전월세인상률 제약에 대해 우려되는 바는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월세인상률 제약 없이는 계약갱신권 보장이 사실상 무색해진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만큼 혼란스러운 곳도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서울 밀집 수요를 분산시키는 동시에 공급을 늘려야하는데 이번 정부도 국회도 자꾸 본질을 빙빙 애둘러 피해가는 느낌이다. 기성권력의 정치적 무책임 속에 결국 피를 보는 건 다시 국민, 특히 가진 것 없는 청년과 취약계층이 된다.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모든 국민에게 공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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