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표정
10년 전, 그 표정
  • 김양미 기자
  • 승인 2020.09.02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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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10년 전.

친구 따라 도예공방이란 곳에 처음 가봤다. 갔다가 재미삼아 만져본 흙의 감촉에 그만 반해버렸다. 통장 잔고가 넉넉했던 친구는 고민 없이 그 자리에서 등록을 했다. 나는 사정이 달랐다. 하지만 손에 묻은 찰진 흙을 씻어내지 못하고 자꾸 쪼물딱 거렸다. 이런 내 고민이 눈에 보였는지 공방 쌤이 말했다.

“집에 가서 천천히 결정해요.”

그리고는 매끈한 가래떡모양 흙 한 덩이를 내 앞에 갖다 주었다. 제일 먼저 흙을 치대 흙 속의 기포를 빼내야한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재밌는 건 세상에 또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흙을 치댔다.

“힘들다. 좀 쉬었다 하자~”

“너나 쉬어. 난 계속 치댈 거야. 흐흐~~”

“근데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실실 웃냐 기분 나쁘게.”

“난 좋으면 자꾸 웃음이 나와. 흐흐~~”

공방쌤 말로는 흙 만지면서 이렇게 좋아하는 어른은 코털 나고 첨 봤다고 했다. 집에 와서도 흙 생각만 났다.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일을 잠시 쉴 때라 지금 아니면 다신 이런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공방에 등록을 하고 본격적으로 흙을 주물렀다. 여유 있는 여자들은 흙 묻은 손을 씻어내며 말했다.

“오늘 점심은 백운 호수에 가서 장어나 한 판 때리까?!”

나는 점심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장어나 누룽지 백숙을 한 판 때리러 여자들이 몰려나가고 나면 나는 공방에 혼자 남아 물레를 돌리고 굽을 깎았다. 도예를 할 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1kg 당 만원이 넘는 소성비였다. 전기가마에 들어갈 때 무게에 따라 돈을 내야 했는데 그릇이 크고 두꺼울수록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얇게 그릇을 빚었다. 공방 쌤이 그런 나에게 말했다.

“코렐 그릇 만들어요? 뭐가 이렇게 가벼워.”

그렇게 좋아하던 도예를 몇 달 하지도 못하고 그만 둬야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곧 다시 만나러 가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그래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봄날의 벚꽃이 ‘아… 미쳤다’ 싶게 만발한 어느 즈음에는 헤어진 애인을 떠올리듯 흙의 속살이 그리워지곤 했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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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둘째가 군에서 휴가를 나왔다. 오랜만에 나온 휴가라 스케줄을 빽빽하게 잡아놨다며 오자마자 친구들과 부산으로 날아갔다. 폭풍이 올라와 바닷물에 몸 한 번 못 담가보고 자갈치시장에서 꼼장어를 구워먹고 있다며, 목요일에는 엄마랑 갈 곳이 있으니 시간을 비워두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리고 수요일 밤늦게 부산에서 돌아온 아들은 나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한 다음 잠이 들었다.

“11시까지 꼭 깨워줘요. 진짜 안 일어나면 큰일 나요. 알았죠?!”

목요일은 아침부터 푹푹 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비는 잠시 소강 상태였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수증기들 때문에 마치 찜통에 들어앉은 만두마냥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런 날 도대체 어딜 가자는 거야. 왠지 짜증이 났다.

“어딜 가자는 건데?!”

“기냥 좀 갈 데가 있어요.”

“말 안하면 안 간다.”

“아 진짜….”

“너 엄마 성격 알잖아.”

“홍대 좀 같이 가요.”

“거길 내가 왜 가?!”

“아 기냥요….”

좌석버스에 올라서도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런 찜통에 군인이랑 홍대를 가야되는 거냐고. 나는 시끄럽고 사람 많은 그런 곳이 싫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복잡한 골목길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는 아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를 바락 질렀다.

“야. 더는 못 가!!”

“다 왔어요 이제.”

저도 처음 가보는 곳인지 한참을 헤매던 아들이 골목길을 돌아 어딘가로 쏘옥 들어간다.

‘도대체 저기가 어디야….’

아들을 따라 들어간 곳은 작은 도예공방이었다. 그러니까 젊은 커플들이 작은 탁자에 마주 앉아 부드러운 흙을 조물거려 컵이나 그릇을 만들고 서로의 이름이나 이니셜을 새겨 넣는 뭐 그런 곳이었다.

 

10년 전. 도예공방을 다니며 만들었던 다기와 찻잔.
10년 전. 도예공방을 다니며 만들었던 다기와 찻잔.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작은 목소리로…)

“야. 여길 왜 와? 엄마 머리도 안 감았단 말야 진짜.”

“휴가 나오기 전에 엄마랑 같이 오려고 예약해 뒀어요.”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않아 컵이나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공방 사장님이 테이블 하나를 내어주며 물었다.

“어떤 사이?”

(뭐래? 보면 몰라?)

“저희 엄마세요.”

“그럴 거 같긴 한데… 내가 여기 공방 하면서 엄마 딸 커플은 많이 봤어도 엄마 아들 커플은 여기가 두 번째거든. 그것도 아들이 엄마 모시고 온 건 첨이네.”

이게 뭐하자는 시추에이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들과 앉아 머그컵을 만들고 물레를 돌려 그릇도 만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맘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았다. 둘째는 그릇을 만들어 뒤에다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을 하늘’과 ‘봄날의 개나리’ 빛깔의 유약을 골랐다. 그릇은 4주 뒤에 나온다고 했다.

공방을 나오며 둘째가 말했다.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엄마 공방 차려줄게요. 거기서 글도 쓰고 그릇도 다시 만들고 해요.”

(하이고~~ 니가 어느 세월에 그런 큰돈을 벌겠냐고요.)

“야. 엄마 배고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는 잊었지만 아이는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10년 전. 엄마가 흙을 만지며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지를 말이다. 아이는 오늘도 내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보았을 테지만 그건 흙 때문이 아니라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해준 아들이 고마워서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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